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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Apr 30. 2024

폭력과 무력에 대하여

5화

기나긴 자학의 시대가 열렸다. 모든 상황이 내 탓 같았고, 그와 어머니 간의 법적 분쟁은 10년 동안 이어졌다. 그가 지속적으로 재심을 청구하며 어머니의 숨통을 조았기 때문이다.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어머니와 나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살아갔다. 나의 학교생활은 우스웠다. 별 것 아닌 일로 죽네 사네 하는 아이들이 한심했다. 겉은 번지르르한 나였지만 당장 매점에 갈 돈도, 지하철을 탈 돈도 부족했다. 먹고 사는 고민이 내게는 더 컸다. 다행히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나마 학교를 잘 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의 속내를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터부시되던 때이기도 했고 이혼가정의 자녀는 모두가 기피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동급생으로부터 불쌍한 취급을 당하고 싶지도, 선생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끔찍한 편의를 위해 그의 딸로서 몇 년을 더 지내야 했다.


누군가가 물었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 외부의 도움은 없었냐고. 우리나라가 제공하는 법적 안전망에 왜 기대지 않았냐고. 그 질문에 나는 악의적으로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폭행이 실시간으로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경찰일지라도 당장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그들은 잠옷 차림으로 비상계단에 앉아 떨고 있는 나를 아무런 감흥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그때의 그 시선은 또 다른 폭력이 되어 내 안에 수치심이란 걸 심었다고 말했다. 또 한 번은 우리의 사건에 함께 분노하던 형사가 결국엔 권력인지 돈인지 모를 무언가로부터 매수되어 증거와 증언의 힘을 나약하게 만들어 그의 편에 서기를 택했다. 그때 알았다, 돈 없고 힘 없는 자는 그저 아래로 곤두박질칠 뿐이란 것을. 폭력의 끝에 남는 건 오로지 무력감뿐이란 것을. 나는 고개를 들어 애써 하늘을 보았지만, 때때로 물속에 잠식되었다. 차오르는 눈물을 얼굴로 흘려내고 싶지 않아 용을 썼지만 잠식의 순간이 오면 흐려지는 하늘을 두 손 놓고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믿음과 배신이 번갈아 오면 사람은 믿음의 순간을 더 쉽게 잊는다. 열렸던 마음을 다시 여는 것보다 굳게 걸어 잠그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이함은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생각지도 못한 상처를 낳는다. 그 상처의 타겟이 본인이 될 수도, 타인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의 빗장을 여닫는 법을 깨우치는 데 또 오랜 시간이 든다. 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쉽지 않은 걸 해냈을 때, 대견함과 성취감이 쌓여 자존감이 만들어진다. 자존감 하나 둘 쌓자고 이렇게나 고군분투하는 인생이 과연 맞는 걸까? 정말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이런 회의감을 반복해서 갖다 보니 어느새 난 성인이 되어 있었다. 성숙을 채 이루지 못한 나이만 찬 어른으로 자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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