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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력자들

(Revision, 舊 '용기의 이동')

by 케니스트리


지능적 배려


업무로 들른 이탈리아의 밀라노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움이 멋진 곳이었다. 화려하거나 중후한 멋의 대리석 건물이 도시 중심을 이루고, 주요 길마다 늘어선 높은 키의 나무들이 클래식의 멋을 완성한 모습이었다. 거의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도시. 그 시간에도 참 변한 것이 없구나 싶어, 어제와 오늘이 다른 도시로부터의 여행자는 부러울 따름이다. 도시의 낭만이 내 마음속에서 흐릿해진 건, 머문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문명에 익숙했던 탓일까, 느린 인터넷 속도에 오른 물가, 몇 번의 불친절함과 멈춘 전철을 경험하며 피로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날도 멀리 행사장에서 도심 근처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들른 전철 역사에서 긴 줄을 서야 했다. 밀라노의 행사장은 서울로 치자면 일산 정도에 위치해 있었고, 가까운 지하철은 파업인지 아예 운행을 하지 않고 있었다.


택시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시간인데다 교통 정체로 요금 폭탄을 맞을 게 분명해, 전철밖에는 답이 없었다. 밀라노에는 지하철과 지상 전철이 도시 곳곳을 연결하고 있는데, 신용카드 태깅(tagging)으로 출입이 가능한 지하철과는 다르게, 전철을 타려면 실물 티켓을 티켓 머신에서 구매해야 했다.


줄이 너무 긴데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었다. 알아보니, 터치 방식의 머신은 오래된 인터페이스에 시스템도 느려 단계마다 처리가 지연되는 것이 이유였다.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어서, 어서 줄이 줄어들기만을 바라며 지루한 시간을 반시각 가까이 보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앞에 한두 팀 정도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쉽사리 티켓을 얻지는 못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한 젊은 여성분이 앞으로 오더니, 머신 사용법을 알려주며 빠르게 티켓을 구매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차례가 되자 내게도 원활한 구매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자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한 친구가 내게 “배려는 지능과 연관이 깊다”고 이야기했었다. 지능이 높을수록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도 알고, 상대의 마음을 살필 줄도 알아, 그들이 배려를 느끼고 또 감사해 선의를 베풀도록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뒤에서 기다리던 티켓 머신 앞 조력자는 앞선 이의 미숙함을 비난하기보다 나서서 도움을 주는 방식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타인을 배려하며 자신의 편의도 도모한 셈이었다. 물론 이는 지능에 기반하지만, 또한 도움을 줄 때는 선뜻 나설 용기가 필요하기도 했다.


빗나간 배려


경기도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던 때 경험한 일이었다. ‘빨간 버스’라 불리는 버스는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두 줄씩 좌석이 있었는데, 자리가 아무리 많아도 버스를 타려는 사람이 더 많아 늘 부족했다. 가까스로 부족한 손잡이를 찾아 부여잡고 어떻게든 버티며 가는 사람들과 편히 의자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몸을 기댄 사람들, 하나의 통로를 사이에 둔 상반된 두 입장이 공존하는 공간은 아등바등 뒤엉켜 살아가는 우리 일상과도 같았다.


그날은 다행히도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버스가 출발을 하고,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여유로운 마음 상태가 되었다. 아마도 여러 영상 콘텐츠를 훑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멀미가 오는 듯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 이리저리 흔들리며 선 통로의 많은 사람들 중에 오른편의 한 여자분이 시야에 들어왔다. 임신부용으로 보이는 큰 원피스를 입은 그는, 옷차림 때문인지 임신부처럼 보였다.


광역버스에서 통로에 서서 간다는 것은 사실 더 많은 체력을 요구해 꽤 피곤한 일이었다. 그걸 아는 입장에서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을 했다.


“여기 앉으세요”


휴대폰을 보던 그에게 일어서서 자리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 여자분은 눈은 동그래지고, 낯빛은 붉어지며 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이어진 거절의 말을 듣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큰 실례를 저질렀구나’.


“저,… 아니에요”


굳이 ‘임신부’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임신한 게 아니라고 전하려는 의도임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아 휴대폰에 얼굴을 묻은 채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정확히 그때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무렵부터는 남을 적극적으로 돕는 일을 서서히 멈추게 됐다. 사회 분위기가 어떻든, ‘남을 돕는 건 기꺼운 일’이라고 믿고 행동해오던 내 안의 어떤 의식은 그 일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대신, ‘원치 않는 친절’을 경계하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예컨대, 전철에서 교통 약자처럼 보이는 사람을 봐도 선뜻 자리를 양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 번은 전철 역사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던 노인분을 지나쳐 한참 걷다가, 결국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이미 도움의 타이밍은 지나 있었고, 그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잔상처럼 마음에 남았다.




요즘 세대의 직관적인 언어라며, 리더의 업무 지시에 ‘왜요?’, ‘제가요?’, ‘지금요?’라고 솔직하게 반응하는 동료들의 용기를 이해하려 애쓴다. (참고로 ‘지시’라는 단어도 요즘 감성에는 좀 안 맞는 것 같긴 하다.) 그러면서도 ‘물론이죠’, ‘언제든지요’, ‘별말씀을요’ 같은 배려의 말은 점점 더 어색해하는 분위기다.


과감한 이성이 적극적인 감성을 앞서는 요즘, 도움이 ‘오지랖’으로 비칠까 싶어 회피하거나 못 본 척하는 일은 일상이든 업무든 흔한 풍경이 됐다. 내가 입을 손해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다른 이를 대가 없이 돕는 용기는 점점 줄어드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그럼에도 다행히, 여전히 많은 동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타인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다른 모양의 퍼즐 조각처럼,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진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이사이를 메우는 존재들이자, 일상의 조력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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