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미술 (2) 아멘호테프(Amenhotep) 시대
고대 이집트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반도에 고조선, 고려, 조선 등 다양한 나라가 있었듯 고대 이집트 땅에도 다양한 왕조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집트 미술이 3천 년간 비슷한 양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예술의 목적이 같았기 때문이다.
이집트 미술엔 인간과 사물을 표현하는 온갖 규칙들이 존재했다. 작업자들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모눈종이처럼 격자를 그린 뒤 도안을 그리듯 신체를 배분해서 그려 넣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 미술은 회화라기보다는 그래픽 디자인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다.
물론 이런 방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집트를 지배했던 건 아니었다. 이집트 미술에도 자연주의적 요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죽은 왕의 영혼을 담기 위해 제작된 조각상들은 처음엔 최대한 실물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며 왕의 얼굴을 그리는 규범이 생겨났다. 무덤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 왕의 석상이 세워지면서 실물을 닮은 조각 보다 권위를 보여주는 작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왕은 최대한 왕답게 표현되어야 했다. 미술품들은 무덤 안에서는 왕의 영원한 삶을 위해 봉사했고, 무덤 밖에서는 전제왕권을 지키는 데 활용되었다. 왕들은 자신의 모습이 이전의 파라오와 다르게 조각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전통적인 표현법에 기대어 자신의 권위를 드러냈다. 그런데 기원전 1350년경에 개성을 내세우는 이단자異端者가 등장했다. 그는 바로 이집트 18왕조의 아멘호테프(Amenhotep) 4세였다.
새로운 신神을 만들다
아멘호테프 4세가 즉위하기 전, 이집트는 힉소스(Hyksos)의 침입으로 거대한 혼란을 겪었다. 그 혼란 속에서 신제국新帝國이 세워졌고,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보수적인 이집트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집트 예술은 전통과 인습의 테두리 밖에 있는 넓은 세계와 만났고, 새로운 왕은 적극적으로 변화를 이끌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오랫동안 이집트 백성들이 믿었던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지 않았다. 그의 신은 더 이상 인간과 동물을 닮지 않았다. 이 새로운 왕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유일신 아톤(Aton)만을 숭배했다. 그는 신의 이름을 본떠서 자기 이름을 아크나톤(Akhnaton)이라고 불렀다. 이 특별한 왕은 인간과 신의 형상을 어떻게 만들지 직접 지시했고, 조각가들의 수장은 ‘폐하의 제자’라는 직함을 얻었다. 이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 아크나톤이 태양신 아톤을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그의 지시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이집트인들에게 분명 생경하게 보였을 것이다. 왕은 긴 얼굴과 원통형의 수염, 두툼한 입술과 가늘고 긴 눈을 가진 몽상가처럼 조각되었다. 그를 묘사한 조각들은 엄숙함과 딱딱한 위엄 대신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냈고, 동시에 새로운 신의 등장을 알리는 예언자로서의 특별함을 보여주었다. 역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는 그의 조각상에서 "정시적 긴장, 좀더 고조된 감성, 거의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신경의 예민성" 등을 포착했다.
<딸들을 안고 있는 아케나톤과 네페르티티>에서 신은 이처럼 특별한 왕에게 축복을 내린다. 원반형으로 표현된 태양신 아톤은 손이 달린 광선을 발산하여 왕의 가족을 보살피고 있다. 왕은 신의 보호 아래 딸을 안고 있고, 왕비 네르페티티는 딸 둘과 함께 보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다. 눈과 몸통은 이집트의 오랜 전통대로 정면으로 그려졌지만 자세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바깥쪽 발은 놀랍게도 엄지발가락이 보이는 안쪽 면을 그린다는 규범을 깨고, 발가락 다섯 개를 다 그려 넣었다. 기존의 전통을 깨고 눈에 보이는 대로 대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신의 탄생을 알리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탄생시킨 아멘호테프 4세는 세계사에서 ‘최초의 예언자’ 혹은 ‘최초의 개인주의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조각과 회화 등을 의식적으로 변화시키고 개혁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다시 과거의 규범으로
아크나톤의 후계자는 투탕카멘(Tutankha-men)이었다. 그의 무덤은 1922년에 발견될 때까지 도굴꾼들의 침입을 받지 않아서 많은 보물들이 고대의 모습 그대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말 그대로 수천 점의 보물들이 무덤에서 나왔는데, 은과 보석들, 복잡한 세공품과 화려한 관棺 등은 당시의 풍요와 부를 과시하는 듯했다.
그중 왕좌의 등받이에 새겨진 부조는 아크나톤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그림 4) 투탕카멘은 의자에 한 팔을 기대고 앉아있고, 그의 아내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다. 이 다정한 부부에게 태양신 아톤은 많은 손을 뻗어 축복을 내린다. 화려한 금박과 뛰어난 세공 기술, 두 인물의 조화로운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투탕카멘의 화려한 부장품들 중 이렇게 자연스럽고 우아한 예술품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보물들은 화려하기는 하나 과장된 형식을 띠고 있었다. 태양신 아톤의 시대는 저물었고, 새로운 시도들은 한 세대 만에 종말을 고했다. 이집트 미술은 이전의 양식으로 빠르게 회귀했던 것이다.
아크나톤과 투탕카멘의 18왕조는 놀랍도록 급격한 변화를 시도했다. 그것이 보수적인 이집트 사회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 변혁은 왜 그리 짧게 끝났을까? 변화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들은 섬나라 크레타(Creta)의 영향을 꼽는다. 자연스러운 신체와 빠른 운동감을 탁월하게 표현한 그리스 크레타 섬의 작품들이 이집트 장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변화가 일어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예술작품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장인들의 기술이 아니라 왕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예술 의지’였다.
국가에 소속된 장인이든, 노예든,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예술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형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지배계급은 사회적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크나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외부의 침략이 지나간 이집트에 새로운 종교를 세웠지만 신을 대리하는 왕이라는 파라오의 위치를 버리진 않았다. 그래서인가 아크나톤 시대의 부조도, 직각으로 교차된 평면 위에, 옆으로 앉아있으면서도 가슴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인물들을 담고 있다. 그의 개성적인 조각상도 새로운 신의 사제이자 제국의 왕으로서의 특별함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이집트 예술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집트 미술이 과거의 규범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외부로 열렸던 문은 닫혔고, 특별한 왕의 시대도 지나갔다. 백성들은 여전히 동물과 인간의 형상을 한 신들을 믿고 있었고, 왕은 엄격하고 비인간적이어서 오히려 신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형식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규범적 형태로 돌아간 파라오의 형상은 고대 이집트가 멸망할 때까지 천년 넘게 그 모습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