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하고도 아름다운
도나텔로(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 ,1386-1466)는 매우 개성 넘치는 작가였다. 그는 아름다운 고대의 조각들이 미의 전범이 되는 시대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했다.
“미켈란젤로의 정신이 도나텔로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도나텔로의 작품과 일생을 요약하면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위와 같이 적었다. 그의 말처럼 두 조각가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둘 다 고전적 형태를 연구하여 새롭게 하였으며, 오래 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 냈다. 그리하여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개성 있는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개성의 방향이 좀 달랐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와 <피에타>를 통해 미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갔다면 도나텔로는 표준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누드의 부활, 인간의 생명력에 대한 찬미
도나텔로의 <다윗>[그림1]은 골리앗의 머리를 한발로 밟고 서서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는 소년 다윗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이 든 거인을 물리친 소년은 중세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르네상스의 생명력을 품고 있다.
<다윗>은 중세 내내 금기시되었던 누드가 부활했음을 알리는 첫 작품이었다. 누드의 부활은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가 다시금 예술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나텔로는 고전기 그리스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콘트라포스토(어깨와 골반이 기울어진 방향이 서로 반대인 자세)를 이용해 소년의 신체에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요컨대, <다윗>은 종교적 주제를 담고 있었으나 실은 인간의 생명력, 피어나는 청춘의 신체에 대한 찬미를 담은 작품이었다.
미의 표준을 벗어난 아름다움
도나텔로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인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함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레미아>[그림2]와 <하바쿡>[그림3]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로 피렌체 대성당 종탑의 외부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상이었다. 조각가는 사람들이 높은 위치에 놓인 조각들을 올려다볼 것을 충분히 고려하고 자세를 구상하였다. 하지만 예언자들을 호감 가는 얼굴로 만들지는 않았다.
예레미아의 긴장된 얼굴은 평온함을 잃었고, 두꺼운 의상은 무겁게만 보인다. 조각가는 유려한 신체를 보여주는 고대 조각의 부드러운 옷 주름을 알지 못하는 것만 같다. 비쩍 마른 하바쿡의 형태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피렌체인들은 대머리에 앙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조각상이 너무 못생겼다고 하며 '호박'이라는 뜻의 ‘죽코네Zuccone’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도나텔로가 얻은 소중한 성과였다. 예언자들의 야윈 몸과 풍성하게 부푼 의상은 대조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예레미아의 굳은 표정은 심각한 내적 고뇌와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며, 하바쿡의 비쩍 야윈 얼굴은 내면적 시련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은 고대의 조각을 따라서는 절대 구현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도나텔로의 자유분방한 창의성은 <막달라 마리아>[그림4]에서 극에 달한다. 이 거친 목조각은 르네상스가 발견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잊은 듯하다. 무서울 정도로 늙고 추한 모습.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행으로 몸은 망가졌지만 정신만은 숭고한 아름다운 영혼을 만날 수 있다.
추하지만 고귀한 인간. 그것은 분명 역설이다. 그런데 도나텔로는 그런 형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조각을 통해 증명했다. 그는 기쁨과 평온뿐만 아니라 격정과 고뇌도 인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추함도 예술이 담아내야 할 숭고한 형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