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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훈련과 아련한 전차의 추억

좌향좌, 우향우... 그런 거 했다니깐 그래요. 과거로 워프!

by 크엘

반마다 따로 맞춰서 입는 반복이라는 제도가 교내에 있었다. 물론 교복이 있는 학교도 있었다.

난 소수민족학교에 다녔고, 거기서는 운동복을 반마다 동일하게 맞춰서 교복대신 입고 다녔다.

다 커서 알고 지내게 된 지인이 있는데 알고 보니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고, 그는 한족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거기에는 교복이 있었다고 했고, 나는 부모님이 알아봐 주신 조선족 중학교에서 수학하게 되어서 다소 다른 제도를 적용했었나 보다.


한족들이 다니는 한족학교에는 교복이 있다고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겐 주변 한족학교에 다니는 한족 친구도 있어서 건너 건너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 반 반복은 잔잔한 무늬가 많은 파스텔 계열 색상이 포인트인 운동복이었다. 흠, 나의 미적감각에는 너무나도 동떨어졌지만 여기서 그걸 논하려면 하루로는 모자랄 것 같으니 쉬잇~

그렇게 사비를 털어 반복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너무 의아했다. 예전에 그런 문화를 겪어보지 않았느니 당연히 그런 감정이 들었다.


왜 반끼리 옷을 맞춰 입는지는 그다음에 알게 되었다. 군사훈련 때문이었다. 멀리 2층 창문을 통해서도 어떤 반이 훈련을 받는지, 퍼포먼스는 어떤지 반별로 색상이 나눠져 있어서 쉽게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내 나이에 학교를 다니는 중고등학생은 군사훈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대학교까지 이어져 군사훈련은 필수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만 대학생이 되면 공청단원共青团员(중국공산주의 청년단 단원)이 될 수 있는데 그때까지 갖춰야 할 기본 중에 기본인 소양중 한 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좌향좌, 우향우, 마치 체육 수업 시간처럼 열심히 열과 오를 맞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친구들과 합을 맞춰 같이 태스크를 완수했을 때의 성취감이 상당히 좋았다. 몸도 쓸 수 있고, 답답한 교실에서 벗어나 탁 트인 운동장에서 움직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좋기도 했다. 한문으로 가득한 수업도 싫었고, 싫은 만큼 머리 아파 공부에서 도망가고 싶었던 그런 날에 밖에 나오면 너무 좋았었다.


현지에도 한인 사회가 있으니 부모님과 왕래하시던 다른 한국 분들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있기도 했다. 물론 부모님은 군사훈련을 한다는 건 알고 계셨지만 다 하는 거라고 하니 그러려니 하고 계시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는 분들은 깜짝 놀라고는 했다! 한국에서 격동의 시절을 보내신 그분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경험과 기억을 기초로 버럭 하시는 분도 계셨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걸 시키냐...라고 말씀하시다가 불현듯 아, 여기는 중국이지. 허허허... 하셨었다.


그리고 사업 차 기차를 타고 어딘가 먼 곳으로 출장을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던 분이 계셨었다. 부모님은 문을 열어두고 잠시 물건을 가지러 가셨고, 원체 말씀이 많은 분이어서 오디오가 없는 상황이 견디기 힘드셨는지 먼저 말씀을 하셨다.

"아휴, 그래도 여기 기차도 생각보다는 타고 다닐만하더구나. 내가 생각하던 거보다는 괜찮던데?"

"그래도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그렇지. 아무래도 타지이니까 무슨 돌발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항시 긴장하고 있었지. 그래도 잘 다녀왔으니 다행이지."

"그러셨군요. 그래도 들어보니까 기차 여행이 생각보다 괜찮으셨던 거 같아요."

"그래. 그랬단다. 기차를 타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말이지. 그래도 얼마 전에 더 좋은 기차로 바뀌었더구나. 예전 생각나서 나름 추억도 되고 그랬는데... 아쉬웠단다."

"맞아요, 맞아. 칙칙 대는 소리가 참 정겨웠죠? 저도 타봤는데 없어졌다고 하니 많이 아쉬어요. 지금 기차가 더 좋지만 옛날 것도 추억인데 이제는 탈 수가 없어서 정말 아쉽죠. 아 그런데 도시에 돌아다니는 전차는 타보셨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어렸을 적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잔뜩 향수에 젖어 계셨는데, 과거에 그 경험을 했던 어린 당신과 비슷한 나이의 아이와 서로 같은 맥락으로 현재 이 시점에서 서로 동일한 주제를 갖고 추억 소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낯설고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셨을까?

완전 20~30년 전 이야기인데 40~50이 된 나와, 그 이야기에 동조하는 십 대 아이라...

후훗, 어른을 당황하게 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간간이 어른들의 과거로 워프 했다가 온 사람 같은 대답을 하곤 했더랬다.



전차 포스터, 서울역사박물관

(출처: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02&seq=20191212214706826&q_exhSttus=all&sso=ok)


전차, 타보셨던 분도 계실 것이다. 그 당시에도 한인 분들이 많이 살고 계셨고 옛날 생각난다며 이것저것 찾아보시고 다니시는 분도 계셨으니 말이다.

하늘에는 전기선이 드리워져 있고 땅에는 레일이, 그리고 전기선을 잊는 커다란 쇠로 된 부품이 전차와 전기선 사이에 달려 있었다. 이이 이잉-하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에 전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침에 학교 갈 때 자주 타고 다녔다. 한국에서는 '오라이~오라이~~'라고 외치던 검표원이 그때만 해도 전차에 탑승하고 있었다. 전차에 타면 검표원 이모가 돈을 받고 거스름돈과 표를 같이 준다. 어디까지 가는지도 물어보고 내리는 사람이 없는 역에 탈 사람도 없으면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정보를 전달해서 정차하지 않고 지나가기도 했다. 게다가 월표月票하라고 해서 월간권을 끊어서 다니면 훨씬 저렴하게 탈 수 있었다. 대신 잊어버리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한다. 허둥대다 월표를 잃어버렸다고 울상을 지은 친구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월말쯤이면 그래도 쉽게 넘길 수 있는데 월초라면 정말 절망적이다. 다들 그랬듯이, 어른에게는 푼돈일 수 있지만 학생에게는 그 푼돈도 엄청 크게 느껴진다. 그 친구는 그때 얼마나 놀라고 막막했을까...

전차는 열차 두 량을 이어서 운행했다. 사람이 많으면 서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아 연결된 부분에 서서 갈 때도 있었다. 상당히 리드미컬하게 울컥울컥 거리면서 움직이는 바닥에 서 있는 모습은 서핑하는 사람을 연상케 한다. 전차가 움직이는 동안 바닥은 계속 움직이는데 그 바닥 양단 쪽에 연결된 어느 한 부분에 틈이 있어 바깥 노면이 다 보이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 노면을 보며 멍 때리면 그렇게 시간이 잘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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