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현실과 타협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꾸준한 치료로 현재는 많이 회복되었고 스스로를 탐구하고 싶어 심리학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29. 스물아홉 번째 진료-(23.07.17 월요일)
“안녕하세요 선생님. 주말 동안 너무 위험했던 것 같아요. 자살 충동이 너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00 씨, 지금 뭐가 그렇게 불안한 것 같아요?”
“제 자신이,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는 게 너무 괴로운 것 같아요. 사고가 비약적으로 튀고, 이때 저를 어떻게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또 그런 사고가 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불안을 자아내고 있어요”
“사고가 비약적으로 튄다는 것이 어떤 건가요?”
“다른 사람들은 1부터 10까지 1,2,3,4,5,6,7,8,8 단계별로 사고하는데 저는 1에서 바로 10으로 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벽에 부딪치면 놓아버리는 성향이 짙고요. 마치 군대에서 랑 비슷한 것 같아요. 포기하려는 성향이”
주치의 선생님이 계속 물었다. 정말 집요하리만치
“군대랑 비슷하다는 게 어떤 뜻이에요?”
“더 이상 희망이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이것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 달라지는 게 없다고 여겨져요”
“만약 수능에서 만점을 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으세요? 방금 제게 “수능이 끝나더라도 인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좋은 결과를 받아들일 때를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수능 만점 받으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누구라도 기뻐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지금 00 씨는 미리 결과를 단정하고 벌써 포기해버리려고 합니다. 이미 수능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단념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부모님한테는 어떻게 이야기하자? 아버지한테는? 어머니한테는?’ 그런 불안을 동반하고 있고요.
지금 00 씨는 성인이시죠? 그런데 지금 보이는 사고의 패턴은 3살짜리 아기와 다를 게 없어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안 된다고 떼쓰고, 그것이 아니면 죽어버리고 끝내겠다는 사고. 죽으면 끝이 날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없어요. 자신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매 순간 일정 부분 타협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두 다 그렇게 살아요. 플랜 A가 안된다? 그러면 플랜 B. 플랜 B가 안 된다? 그럼 플랜 C.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과 현실을 조율하면서 맞추어 나가는 것이죠.
저도 최근에 이사를 했어요. 자그마치 20년 된 아파트로요. 새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지난번에는 새 아파트에 첫 입주민으로 들어갔죠. 이사를 하면서 어제도 ‘괜히 이곳에 왔나?’면서 후회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야죠.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고 그때 내가 마주한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요.
00 씨, 공부 안 한지 10년이 다 됐죠? 그런데 지금 바로 결과가 안 나온다고, 결과가 안 나오니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해서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이 지점이 외부에서 봤을 때, 아버지가 봤을 때 과대망상적이고 망상장애적으로 보이는 것이죠. 정신과에서는 Realistic, 즉 현실감각이라 부르고요. 내가 필요로 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2년, 3년 투자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 아닌가요?
그리고 앞으로 단순히 피상적으로 “군대랑 비슷해요. 불안해요”가 아니라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불안한 건지, 그 불안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00 씨는 현실 감각이 많이 떨어진 상태로 지금껏 살아왔고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로 지금까지 온 것이죠. 그런데 작년 11월부터 하는 치료를 통해 ‘내가 지금 이런 사고를 하고 있구나’를 알아채고 그것을 조절하기 위해서 계속 진료를 보고 검사를 하는 것이고요.
지금 00 씨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해 보는 거예요. 플랜 A는 무엇이고 이게 안 됐을 때 플랜 B, C, D는 무엇이고 이것들을 얻기 위해서 내가 투입해야 하는 자원과 그것들이 가치를 계산하고 정리하는 것이죠.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타협을 하면서 말이죠. 00 씨는 지금껏 이 부분이 굉장히 부족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 이번 주에 다시 오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