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노트와 연필
'띵동~ 띵동~~'
조부모 내외가 사시는 구미의 한 아파트 현관 앞.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나? 참말로 방갑데이! 우짠 일이고?"
"할아버지가 오라 하셨잖아요..."
"아 참 글네, 나이 드니깐 자꾸 깜빡깜빡한다...흐흐..먼길 와주서 고맙 데이~"
할아버지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시며 내 양 귓불을 비비시면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어이 보레이~ 맛난 거 마이 차리라. 울 강아지 배불리 묵이게"
"알았소. 당신 강아지기도 하지만, 내 강아지기도 하요.."
할머니가 받아 치시면서 음식 준비를 하시려 가셨다.
그렇게 셋이서 저녁을 맛나게 먹고나서 쇼파에 모여 앉았다.
"할아버지 또 뭐하실려고 저 부르셨어요? 또 사고 치시는 거 아니시죠?"
"아이고, 아이다~~ 사고는 무신..."
"그라마 뭔데요?"
"음... 내가 오래 된 꿈이 있는 기라.. 그래서 니 한테 내꿈 좀 같이 맹글어 달라고 할라 그라제."
"꿈이요???"
"니가 마 큰 회사에 높은 어르신이기도 하지만, 또 그 뭐꼬? 아 맞다.. 책 쓰는 작가기도 하잖아."
"흐흐 무신 작가까지는..흐흐.. 근디 작가는 왜요?"
"아~~ 내가 소싯적 꿈이 있던 기라. 그게 바로 작가여.."
"와 하하하하... 앗.. 할아버지 죄송해요.."
"흐흐흐 마 개안타.. 쪼매 버릇없기는 하지만.. 우리 똥강생이.."
할머니가 들고 오신 사과 조각을 포크로 집어 입에 넣으면서 할아버지께 물어봤다.
"작가가 꿈이셨다니 완전 다시 보게 되는데요?"
"농은 그만하고 니 내 도와줄 끼가 안도와줄 끼가?"
"할아버지가 불러서 약속 취소하고 왔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이제 바른 말 하네.. 배 채웠으면 나랑 방에 좀 들어가자"
"방이요?"
"내가 보여줄 게 있다."
"네"
할아버지와 나는 할아버지 서재로 쓰시던 방에 같이 들어갔다.
어둑한 방에 스위치를 켜니 오래된 책 냄새가 코를 찔렀다.
책장을 보니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대부분 낡은 책들이었다.
'드르륵'
할아버지가 쓰시던 책상 서랍을 열고 선 낡은 공책 하나와 연필을 들고 오셨다.
"할아버지 이 공책은 뭐에요?"
"아~ 내 책이다!"
"에??"
"내가 책으로 펴 낼라고 혼자 조금씩 쓴 자서전이다."
"와아~~ 자서전을 쓰신 거에요?"
"이런 공책으로 몇 권 된다."
할아버지는 서랍을 다시 여셨다.
서랍 안쪽에는 낡은 공책이 정말 대여섯 권이 더 보였다.
"할아버지 이걸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 공책의 내용을 그 뭐시기고? 전자책인지 전기책인지.. 그거 내볼라고.."
"아~~ 전자책이요?"
"으 그래.. 전자책! 그거 한 번 해볼라고 그란다 아이가.. 니가 좀 도와도."
"전자책 저도 출간해봐서 도와드릴 수 있긴 한데... 대단하시네요.."
할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하시면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마치 본인의 꿈을 나를 통해 반드시 이루실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나도 할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세월의 격랑 속에서 힘겹게 살아오신 땀과 노력의 마치 밭이랑처럼 얼굴에 주름으로 패여 있었다.
이제 깡마르시고 거칠거칠해진 손을 나에게 내밀어 내 손을 조용히 감싸 쥐셨다.
"니가 내 꿈을 이룰 수 있게 좀 도와다오."
"아.. 당연하죠 할아버지.. 네네..."
갑자기 뭉클해졌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다음 말에 왈칵 눈물이...
"나도 얼마나 살지는 몰겠는데.. 인생을 한번 정리하고 싶기도 하고 살면서 후회한 것 다른 사람들이 되풀이 안 했으면 하는 맴도 있고, 그리고 내가 떠나면 한 줌의 흙이 되삐면.. 가끔 할매랑 너네 아부지, 그리고 울 강아지가 이 책이라도 보면서 추억이라도 하라고..."
"할아버지... 그런 의미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대단하셔요..."
"민수야.. 그리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시는 할아버지. 뭔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불안함이 이내 현실이 되었다.
"민수야.. 실은 할배 한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구나..."
"할아버지 무슨이야기 하세요? 이렇게 건강하신 데...."
"너거 할미랑 병원 댕기 왔는데.. 췌장암이라 더구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늘어뜨린 나의 어깨를 연신 쓰다듬어 주시면서.
"할배도 많이 살았다 아이가. 그리고 우리 훌륭한 손주까지 보고... 더 여한이 없다. 하나 있다면 이쁜 손주 며늘아기 못 봐서 글체..."
"흑흑..... 할아버지! 아니에요 분명 수술 받으시면 나으실 수 있으실 거에요..요즘.. 얼마나 의료기술이 좋아졌는데요.. 제가 모실께요.. 좋은 병원으루요.."
"아이다. 마 됐다. 니 애비가 소개해줘서 서울에 큰 병원에 벌써 다녀왔던 기라...거서 그리 말했으니 쉽지 않을 끼다..."
"아닐거에요.. 제가 아부지한테 전화드려 볼께요.. "
다시금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는 우리 할아버지...
그러보 보니 지난 번 보다 확연하게 살이 빠지시고 주름살이 깊어지신 것 같다.
'아.. 불효손이었구나.. 내가 평소에 연락도 잘 못 드리고...'
"민수야 할애비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나 좀 도와주겠니?
"도와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병도 나으실 수 있게 제가 노력할께요.."
"고맙구나 우리 강아지...!"
할아버지가 엷은 미소를 지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