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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Oct 06. 2021

엄마의 김치죽

그리운 맛



어려서 유난히 배앓이를 자주 했던 나는 창자가 뒤틀리는 그때의 아픔을 아직도 기억한다. 배가 뒤틀리기 시작하면 얼굴빛은 노래지고 양쪽 침샘이 용트림을 한다. 침샘의 용트림으로 입안 가득 침이 고이고 나면 토가 나온다. 아무리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는 창자의 반란은 속에 있는 것을 다 뱉어내고 나서야 잠잠해진다. 그러고 나면 두 팔과 다리에 기운이 쫙 빠지면서 손발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다.


다섯 형제들 가운데 유독 나만 배앓이를 자주 했다. 왜 그랬을까? 언젠가 대학 선배 언니가 배가 자주 아픈 사람들은 성미가 고약해서 그러는 거라고 놀리곤 했는데 뭐든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내 성미를 콕 집어서 하는 말 같았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울어대면 엄마는 순식간에 나를 둘러업고 집에서 오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김 소아과로 달음질치곤 하셨다. 불난 집에 정신없는 아낙처럼. 배앓이는 이렇게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막냇동생을 제치고 엄마의 등에 종종 업히는 것을 허락했다. 멀쩡했을 때는 도무지 차지할 수 없었던 엄마의 등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등에 업히고 싶어서 배앓이를 자주 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엄마의 잰걸음으로 도착한 소아과에서 의사 선생님은 차가운 청진기로 꼬마의 아픈 배를 더듬거렸다. 처방전이 간호사에게 전달되면 소독 내 나는 주사실에서 한쪽 엉덩이가 얼얼해졌다. 따끔한 주삿바늘에 놀라 흘리던 눈물은 간호사가 준 사탕이 달래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자리를 깔고 누워있다 보면 아픈 배가 진정되었다. 그때 엄마의 밥상 위로 찹쌀을 넣고 끓인 김치죽이 올라왔다.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한 입 넣으면 연한 김치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수저질을 할 때마다 ‘우리 둘째 딸 배 아픈 것 다 나았으니 축하를 해야지’ 하는 축제의 음식 같았다.


배앓이가 다 낫고 온 가족이 한상에 둘러앉아 먹던 그때의 김치죽,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먹던 그 김치죽은 김장김치가 시어지기 시작하는 늦겨울과 초봄이 만나는 시기에 가장 맛있었다. 겨울과 봄을 품고 있는 김치죽은 배앓이로 인해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이른 봄의 죽이었고 묵은지가 항아리에서 곰삭아갈 때 발그스레 한 색으로 익은 엄마의 사랑이었다. 먹을 것이 흔치 않았던 시절의 김치죽은 이렇게 엄마의 따뜻한 정성을 은은하게 표현해 주었기에 김치죽의 소박하면서도 개운한 맛은 기억 속에서 입맛을 자극하는 추억의 음식이 되었다.






배앓이가 아니어도 우리 식구들이 김치죽을 먹을 때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직장 회식으로 술을 많이 먹고 오셨던 다음 날엔 엄마의 아침 밥상 위로 김치죽이 올라왔다. 아버지의 김치죽은 아픈 배가 낫고 먹던 것보다 국물이 더 많아서 수저로 휘휘 저으면 이게 국인지 죽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엄마의 밥상에서 아버지는 속을 달래느라 발그레한 국물만 훌훌 드셨고 우리 5 남매는 김치죽에 밥을 말아 반찬을 얹어 먹었는데 그때 먹던 김치죽은 어른의 맛이었다.


엄마의 죽을 추억 하며 김치죽을 끓였다. 늦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한껏 맛을 내던 엄마의 김치죽과는 달리 내가 끓인 김치죽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김치죽 같았다. 김치냉장고의 위력으로 사계절 내내 묵은지를 먹을 수 있으니 그 어찌 특별하다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난봄, 수차례의 항암주사를 맞던 동생이 메스꺼움 때문에 다른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하던 날, 내가 끓인 김치죽을 한 사발씩이나 비워내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내가 끓이는 김치죽도 동생 덕분에 엄마의 김치죽에 잇대어 정성스럽고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음식의 맛도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있다. 어린 시절 한상에 둘러앉아 함께 먹었던 엄마의 맛,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추억의 맛은 언제까지나 기억 속에 서 변하지 않는 맛이다. 단지 그때의 나와 우리의 입맛이 변했을 뿐.








*주먹구구 레시피 <김치죽>


재료: 묵은 김치 1/4쪽, 찹쌀 1컵, 멸치 다시마 육수 5컵


1. 찹쌀은 미지근한 물에서 1시간 이상 불린다.

2. 묵은 김치 1/4쪽은 가위를 이용해서 잘게 잘라준다.

3. 멸치육수 5컵에 묵은지 잘라놓은 것을 넣고 푹 끓여준다.(김치가 익을 때까지)

4. 불린 찹쌀을 넣고 쌀이 퍼질 때까지 약불에서 끓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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