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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Oct 12. 2024

그가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우리가 예전에 잘 알고 지내던 국제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랜시간 연애한 커플이었다. 한번은 우리가 국제연애와 관련한 팁을 달라고 하자 그들이 말했다.

“팁이라면... 상대방 나라의 안 좋은 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거야.”


상대 나라의 문화가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하더라도 부정적인 얘기는 삼가는 게 좋다고 했다. 사실 나에게는 이 룰을 지키는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대만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일 길게 있어봐야 3주였기에 희로애락을 느낄 만큼 충분히 살아보지 못했다. 잘 모르기에 불만도 없었다. 잠깐 만난 대만 사람들은 늘 친절했고 순수했다.


반면에 그는 한국에 자주 오기도 했고, 반년 간 살았기 때문에 나보다는 한국의 문화나 분위기 속에 깊게 들어와 보는 경험을 했다. 그는 처음 한국에 온 후, 한국의 경직된 분위기나 대화방식을 힘들어하는 듯했다. 밖에서 우리 둘이 중국어로 대화하다 안 좋은 경험을 한 적도 있기에 나는 '그가 한국에서 지내는 게 과연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사람들은 이래서 별로라든가 문화는 어째서 힘들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늘 내게 한국의 좋은 점만을 말했다. 내가 가끔 그에게 한국이 좀 삭막하긴 하지?라고 물으면 그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뚜렷하게 한국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 과일이 너무 맛이 없으면서 심지어 비싸다는 것이었다. 그가 한국에서 장을 볼 때면 과일값에 놀라 뒤집어졌는데 그건 한국인인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같이 과일값에 대해 신나게 불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었는데, 바로 한국쌀이 맛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는데, 사실 나도 대만에서 쌀을 먹어보고 속으로 대만쌀이 맛이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대만에서 먹는 쌀은 펑라이미蓬萊米로 일본 자포니카쌀의 두 가지 품종을 교배해 만든 쌀이다. 대만은 원래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먹는 인디카(인남미)를 먹었는데 일본이 대만을 지배한 시기에 대만 땅에 도착한 일본인에게는 인디카가 입맛에 맞지 않았다. 일본 연구원들은 20여 년간 대만에서 자포니카를 재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연거푸 실패했다.

대만은 낮의 길이가 길고 덥고 습하기에 벼꽃이 너무 빨리 피어 자포니카가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 연구실에서 인디카 500여 종 중 자포니카와 일부 유전적인 일치를 보이는 10여 종의 품종을 찾아 자포니카와 비슷한 맛을 내보려고 개량해 보았지만 또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일본 연구원들은 자포니카의 품종 두 가지를 교배하여 묘목을 재배하여 대만에서 뿌리내리는 데에 성공했고, 그 이름을 전설적인 신화의 땅에서 따와 펑라이미로 지었다. (대만의 농부들은 오랜 기간 펑라이미를 농사지어 일본에 팔고 자기들은 값싼 인디카를 사 먹으며 일본의 착취속에서 자신의 땅을 지켜냈다.)


그러니 사실 한국과 대만에서 먹는 쌀은 자포니카로 큰 범위로 보면 같은 품종의 쌀이다. 하지만 먹어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한국쌀은 더 찰기가 있으며 쫀득하고, 대만쌀은 찰기가 없이 가볍게 고슬거렸다.


나는 뭐든 잘 먹는 편이어서 향신료가 강한 대만 음식도 다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데, 내가 대만요리를 먹으며 가끔 1프로가 부족하다 느꼈던 건 알알이 흩어지는 밥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 차이는 아주 미세한 차이었다. 또 대만 쌀은 찰기는 없는 대신 구수한 향이 너무 좋아서 그만의 매력도 있었다. 그래서 밥맛 하나로 식사가 불만족스럽진 않았는데, 그는 달랐다.

그는 그 차이가 미세하다고 느끼지 않는 듯했다.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 그는 한국쌀의 찰기가 좋고 쫀득한 맛을 입에 달라붙는다고 표현했다. 그는 한국쌀이 찹쌀요리인 요우판油飯의 식감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요우판油飯은 영어로 sticky rice라고 부를 만큼 끈적이는 한국의 약밥같은 음식이다. 그에게는 한국쌀이 그런 느낌이니 매끼 식사로 그런 끈적이는 쌀을 먹는 건 싫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쌀밥만은 자기가 원하는 식대로 먹고 싶어 했고 나는 별 상관이 없었기에 그러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밥을 먹을때는 늘 한국쌀을 세상에서 제일 안찰지게 먹는 방법으로 지어 먹었다.


한 번은 마트에서 햅쌀이 나왔기에 얼른 10킬로짜리 쌀을 사 왔다. 원래는 좁은 원룸에서 보관하기가 쉽게 4킬로씩 샀지만 1년 중 제일 맛있는 쌀을 먹을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무거운 것도 모르고 들고 왔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내 기대와 사뭇 달랐다.


"감자야... 이 쌀이 왜이래?"

"응? 너무 맛있지 않아?"

"아니야... 이 쌀은 너무 끈적거려..."

그에게는 수분이 가득하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햅쌀이 너무 끈적했던 것이다. 그는 햅쌀을 최고로 건조하게 짓는데 공을 들였고 나는 '이 아까운 햅쌀.....' 하며 주인잘못 만난 촉촉한 햅쌀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10킬로짜리 햅쌀은 다 먹어 없어질 때까지 그에게 꽤나 골칫거리였다.


그와 나는 서로 나라의 낯선 음식을 시도해보는걸 즐겼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가 원래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했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쌀밥만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평생을 먹어온 음식이었다. 나는 한국쌀에 길들여져있었고 그는 대만쌀에 길들여져있었다. 나는 내겐 너무나 맛있는 그 햅쌀이 그에게는 불만족스러운걸 보며 음식은 먹고 자란 기억이 절대적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


또 한 번은 그가 말했다. "감자야 밥의 맛은 쌀이 아니라 밥솥이 좌우했나봐."

우리 집 밥솥은 40만원짜리 쿠쿠 압력밥솥이었는데 나는 자취를 시작하며 큰맘 먹고 그 밥솥을 샀다. 그 당시 내 자취방 가전 가구중에 제일 비싼 놈이었다. 그런데 그는 한국에 사는 대만인의 블로그에서 한국 압력밥솥을 대만 밥솥으로 바꿨더니 밥이 맛있게 된다는 글을 읽었다고 했다.

압력을 줘서 쫀득한 최상의 밥맛을 만들어 낸 것이 대만인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로 다가왔나 보다. 그는 한국밥솥을 대체할 밥솥을 찾다가 솥밥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가 알려주기 전까지 나는 한국사람들이 그렇게 다양한 솥밥요리를 먹는지 몰랐는데, 솥밥은 요리클래스와 요리책까지 따로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는 솥밥에 빠져든 뒤 한동안 여러 솥밥요리를 했다. 나는 그가 솥밥에 그렇게까지 빠져든 이유에 여러 재료의 조화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솥밥으로 밥을 지었을 때 특유의 가볍게 날리는 고슬고슬한 쌀맛이 대만의 쌀밥과 제일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가 솥밥요리에 푹 빠져있다고 알려줬다. 엄마는 그럼 다음에 오면 남자친구에게 맛있는 솥밥요리를 해주겠다며 좋은 주물냄비도 장만했다. 머지 않아 엄마는 시행착오를 겪고 이제는 완벽한 맛을 낸다며 자신만만했다.

남자친구와 함께 본가에 갔더니 아빠는 2주 동안 매일 솥밥만 먹었다고 투덜댔다. 대게 냄새가 나서 물어보니 대게 솥밥을 했다고 하셨다.


기대에 부풀어 딱 입에 넣고 나서 그와 내가 동시에 눈빛을 교환하며 웃었다. 엄마가 쌀에 찹쌀을 섞은 것이었다. 먹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엄마에게 찹쌀을 섞었냐 물어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이게 솥밥을 하다 보니깐 뭐 미리 쌀을 불리고 체에 건지고, 육수에 미리 볶고 별짓을 다해도 밥이 찰지지가 않아. 그래서 햅쌀에 찹쌀을 조금 섞고 참기름을 조금 넣으니깐 그나마 낫더라! 어때? 압력밥솥에 한 거랑 비슷하지?"


그는 엄마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솥밥이라고 했고 내가 계속 실실 웃으니 내 입단속을 하려 다리를 툭툭 쳤다. 엄마가 남자친구에게 주고 싶었던 궁극의 쌀맛은 그가 그렇게나 멀어지려고자 몇 달을 노력했던 쌀맛이었다. 우리가 계속 눈을 마주치며 웃으니 엄마는 너무 맛있어서 그런 줄 알고 기뻐하셨다. 나에게는 최고로 맛있었다.



미역국, 마라메추리알조림, 양파장아찌, 버섯톳솥밥

그는 원래는 명란솥밥을 제일 좋아했는데 본가에 가서 곤드레 솥밥을 먹은 이후에는 곤드레솥밥에 빠졌다. 내 요리를 그렇게까지 맛있게 먹은 적이 있었나? 묘하게 섭섭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가 어렸을 때 대만에서 대장금의 인기가 엄청 났다는데 그의 친척들에게 인사가서 내가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면 어르신들이 항상 대장금 얘기를 하셨었다. 그는 곤드레 솥밥을 먹고 흥분해서 우리 엄마를 코리안 대장금이라고 했다. 속으로 장금이는 원래 코리안인데... 싶었다.

그는 솥밥을 도시락으로 싸줄 때 국을 같이 넣어주었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20년도 겨울은 당시 상황 때문이었는지 유난히 춥게 느껴졌었는데 밖에서 그가 싸준 국을 먹으면 마음이 따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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