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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Dec 18. 2024

그의 고백

우리 연애의 시작

그의 첫 번째 한국여행이 끝나고 얼마 뒤, 그는 나를 만나러 다시 한국에 왔다. 나를 잘 쳐다보지 못하고 힐끔대는 그가 귀여웠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가 테이블을 보면서 말하는 덕분에 나는 그의 얼굴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이틀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그는 알바를 하러 돌아갔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도 알바가 없는 주말에 보러 올게.

다다음주에 학교 개강이라고 하지 않았어?

응 근데 괜찮아! 따로 개강 준비할 것도 없어.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내가 갈게!

정말?

응. 이번엔 내가 갈게! 나는 개강까지 2주 더 시간이 있잖아!

그를 보내며 그날 바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겠는 어색한 남자를 만나러 대만에 가는 길,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 혼자 대만에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캐묻길래 둘러대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간의 일을 다 말했다. 나는 그가 얼마나 귀엽고 순수해 보였는지, 이 만남이 얼마나 운명 같았는지에 대해 말했지만 친구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그 남자.. 안전한 남자인 거 확실해?

응? 그건 잘 모르지...


친구들은 자꾸 장기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했고 나도 대만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출국장에서 꽃다발을 들고 수줍게 서있는 그를 만나니 그런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을 보니 마냥 기뻤다.


우리는 타이페이로 넘어가지 않고 타오위안에서 2박 3일을 보내기로 했었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타이페이로 이동해도 되긴 하는데... 그냥 타오위안에서 놀아도 돼. 거기에 내 친척들이 많이 살아서 맛집을 추천받는데 문제도 없고, 타오위안도 큰 도시야.

나는 일주일 전 그에게 그러자고 했었다. 숙소로 짐을 옮기러 가는 길에 그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타이페이 관광을 못 시켜주는 거 미안해. 그렇지만 이동 시간 없이 감자랑 오래 놀고 싶어서...

나를 잘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마음 표현은 솔직하게 하는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첫날 데려갔던 식당이나 보여준 타오위안의 풍경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온 신경이 그에게 가있었다. 그런데 길을 구경하며 한 가지 신기했던 건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차만큼이나 많이 길을 쓸고 다니는 오토바이에 내가 감탄하자 그가 말했다.

출퇴근 시간에는 오토바이가 더 많아. 대만 사람들은 대중교통보다 오토바이를 더 많이 이용하거든.

그렇지만 너는 버스를 타지 않아?

타이페이는 대중교통이 편해서 나는 버스를 타. 하지만 누나와 형 둘 다 오토바이가 있어서 내가 빌려서 타고 다닐 때도 많아.

오 그렇구나...


내가 그에게 오토바이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고 말하니 그는 오토바이를 타보고 싶냐 물었다. 내가 매우 타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그럼 다음번에는 오토바이로 타이페이를 돌아보자고 했다. 그리고 밤늦게 나를 숙소에 바래다주고 친척집으로 돌아간 그에게 연락이 왔다.

사촌형이 내일 오토바이를 빌려준다고 하는데 혹시 오토바이 타볼래?

나는 바로 타보고 싶다는 답장을 했다. 잠에 들기 전 다음날을 상상했다. 그의 뒤에서 같이 오토바이로 여기저기 구경 다니는 상상... 생각만 해도 설렜다.



다음날 만난 그는 정말 오토바이를 끌고 와서 헬멧을 들고 서있었다. 빨리 타고 싶었지만 전날 아침 식당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기에 우리는 먼저 근처 식당에 갔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사촌형에게 전화가 와서 자기 오토바이 뒷자리가 너무 높아서 내가 무서울 수도 있으니 자신의 동업자의 오토바이를 빌려주겠다고 하셨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있는 식당으로 사촌형의 동업자가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가지고 와주셨다. 정말 친절한 분이시구나 싶었다.


오토바이를 타기 전 그는 겨울엔 손이 춥다며 나에게 장갑도 껴주고 목도리도 둘러줬다. 정작 나는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그는 자꾸 나를 안심시켰다.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천천히 달릴 거고 커브도 안 무섭게 돌 거야. 알겠지?

응!


그의 뒷자리에 앉으니 그가 나를 돌아보며 자기를 좀 잡아야 될 거라고 말했다. 그의 옷을 살짝 잡았다. 그때는 손도 아직 안 잡았을 때라 그의 몸을 덥석 잡기가 조금 그랬다.

옷 잡으면 되는 거지?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응! 그런데 달리다가 무서우면...

그러더니 자기 배 쪽을 팡팡 쳤다. 여기 잡아도 되고...

팔로 감싸도 된다는 건가? 그러기엔 좀 쑥스러워서 그의 외투를 살짝 잡았다. 그가 나에게 준비됐냐고 묻고 내가 준비됐다고 하자 바로 출발했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깜짝 놀라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은 몰랐다! 볼 때는 평안해 보였는데 막상 타보니 생각보다 더 더 무서웠다. 설레서 가슴이 뛰는 게 아니라 추락해서 여기서 생을 마감할 것 같아서 가슴이 뛰었다. 그의 옷 양쪽을 생명줄처럼 꽉 잡고 오토바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5분도 안 걸렸던 첫 번째 오토바이 탑승은 낭만이 아닌 공포였다.  


그가 내려서 어떻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여유롭게 즐긴척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보는데 둘씩 탄 오토바이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아까 전 나와 그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운전자에게 몸을 밀착하고 운전자를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원래 저렇게 타는 건데 내가 목숨을 내놓고 탄 걸까? 아니면 연인이라서 저렇게 타는 걸까? 그런데 다른 오토바이를 보니 남자 두 명도 뒷자리에 앉은 남자도 운전자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단지 끌어안을 뿐이 아니라 자신의 턱을 앞사람의 어깨에 탁 걸치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나... 원래 저렇게 타는 건데 내가 목숨을 내놓고 탄 거였구나!


나는 다음에 뒷자리에 타서는 그에게 말했다.

정말 허리 감싸도 돼?

응!

꽉 잡아도 돼?

응!


그의 뒷자리에 타자마자 바로 몸을 밀착하고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양손으로 깍지를 야무지게 꼈다. 설렘이고 뭐고 내 목숨을 지키는 게 먼저였다. 다음 행선지는 좀 먼 곳이라 10분이 넘게 걸렸다. 그에게 딱 붙은 자세로 몇 분 타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나는 신호대기 중간중간 거울로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거울 속에서 눈을 마주친 그가 또 눈을 피했다.

귀엽당...


좀 타니 금방 적응이 됐다. 계속 긴장하며 깍지를 꽉 끼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허리를 감싸던 그 자세로 깍지를 풀고 손을 턱 내려놓고 가는데 그가 갑자기 내 손을 끌어올려서 아까처럼 허리에 감쌌다. 이거는 위험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끌어안는 게 좋은 걸까? 두려움이 가시자 갑자기 이렇게 안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창피하면서도 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오토바이가 재밌다고 또 타고 싶다고 말했고 그는 나를 데리고 오래도록 한적한 길을 찾아 쭉 돌아주었다. 무서운 게 사라지니 그의 등에 매미처럼 찰싹 붙어서 같이 달리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 설렜다.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와 저녁을 먹고 걸으며 얘기를 하는데 그가 자꾸 입을 달싹 거리며 머뭇거렸다. 내가 할말이 뭐냐고 편하게 말하라고 하니 말을 꺼냈다.

사실... 대만에선 연인 사이가 아니면 뒷자리에서 절대 껴안지 않아.

응? 정말?

응.

그럼 무서운데 어떻게 타?

대만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뒷자리에 타기 때문에 안 무서워해. 친구사이면 터치하지 않고 그냥 두 손 놓고 가거나 너무 빨리 달리면 의자 뒤쪽에 손잡이를 잡고 가. 터치하면 좀 선을 넘는거야.


그렇구나. 나는 그게 손잡이인지도 몰랐다. 조금 부끄러워져서 그에게 '내가 너무 찰싹 달라붙었지?' 하고 묻자 그가 말했다.


나는 감자가 나를 꼭 껴안았을 때부터 감자는 더 이상 나에게 친구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뒷자리에서 나를 껴안은 여자는 감자가 처음이야. 그리고 나한테는 그 의미가 커.  

어...?


나는 그의 말이 고백인지 아닌지 헷갈렸지만 그럼 우리가 이제 사귀는 사이냐고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어색하게 웃고 나서 우리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며 좀 더 걸었고 깊은 밤이 되니 그는 나를 숙소에 데려다줬다. 숙소에 가는 길, 내가 몇 번 더 손에 힘이 빠지니 그는 다시 내 손을 끌어올려서 자기 배에 찰싹 붙였다.

꽉 껴안는 게 연인이 되는 거라면... 지금 내 손을 끌어올리는 건 나에게 확답을 주는 건가? 나는 그의 등에 붙어서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가 사귀는 사이냐고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그가 들을까 봐 걱정됐다.

그리고 숙소 앞에 내려서 그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아까 같이 오토바이 탔을 때... 내가 좀 느슨하게 껴안으면 손 다시 끌어올렸잖아. 그거 왜 그런 거야?

그리고 그의 입에서 우리의 관계를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생뚱맞은 얘기를 했다.


사실 그때 감자 손이 자꾸 내 어딘가에 닿아서... 손을 올린 거야.


...응...?


감자가 팔에 힘을 빼니깐 장갑 낀 손이 내 어디에 닿아서... 올렸어...


잠깐 머리에서 버퍼링이 걸렸다. 그 어디가 내가 생각하는 어디...? 그는 그런 어마어마한 말을 하면서도 부끄럽다는 듯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너 왜 그런 말을 하면서 그렇게 수줍게 웃는 거니...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얘는 변태일까 아니면 바보일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바보 쪽인 거 같았다. 긴장됐던 마음은 와장창 깨지고 어이가 없어서 황당한 웃음이 나왔다.


그와 헤어지고 침대에 누워 다음날 출국을 위해 자야 하는데 잠을 설쳤다. 오늘 내가 그를 껴안았으니 우리는 연인이 됐다는 뜻일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그를 잡고 물어봤으면 되는데 그때는 뭐가 무서웠는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얼마 뒤 손을 잡고 포옹을 하며 얼렁뚱땅 연인이 되었고 이제는 그와 정말 연애를 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어느 날, 그가 우리의 100일이 다가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100일? 기준이 뭔데?

그때 타오위안에서 내가 고백했잖아.

응?

오토바이 탄 날 내가 감자한테 고백했잖아!

근데... 누가 고백을 그런 식으로 해...

왜? 감자는 내 고백이 싫었어?

그게 아니라... 너 그날 이상한 데에 내 손이 닿았다고 했었잖아, 이 변태야!

나는 그건 하나도 안 중요했어. 그전에 내가 고백한 게 중요하지!


그리고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굳이 따지면 변태는 감자지... 그건 감자손이었잖아...



나에게 설렘과 황당함을 함께 안겨줬던 그날은 우리의 연애 1일이 되었다. 몇 년 후 시간이 흐르자 그는 그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나 그때 완전 미친놈이었네... 그는 그때가 최고의 흑역사라고 했고 나는 대만에서 그와 함께 오토바이를 탈 때마다 그날을 얘기하며 그를 놀렸다.

그렇지만 사실은... 처음으로 그와 함께 달리며 주체할 수 없는 내 심장소리를 듣던 그날의 기억은 내게는 너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프렌치토스트, 라구파스타, 딸기


마지막화는 마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쓰고 싶었지만... 이게 최선이었습니당...ㅎㅎ 브런치의 끝이라 시작할 때를 써보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글을 써본 건 브런치 연재가 처음이었습니다. 연애이야기와 도시락 이야기가 이리저리 섞인 정체불명의 글이었는데도 독자분들께서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신이 났었어요! 덕분에 연재 전날부터 즐겁게 글을 썼던 4개월이었습니다.  

또 마침 이제 조금 바빠져서요. 앞으로는 브런치의 독자로 돌아가겠지만 다음에 또 연재를 하게 된다면 그때 재밌는 글로 돌아올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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