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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koya Jun 24. 2022

두근두근 커피 한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나는 새로운 도시에 방문하게 되면 꼭 커피 한잔을 먼저 찾는다. 커피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카페인에 무척 예민해 커피 속 카페인의 함량에 따라 그 도시의 피로도를 대략 몸으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직접 몸으로 겪어본 바로는 어느 정도 정확하다. 뉴욕에서는 종종 삼일 밤낮을 뜬 눈으로 보내도 괜찮을 정도의 강력한 커피를 마셔야 했고, 피츠버그에서는 대략 하루를 버틸 정도, 시애틀에서는 평소 수면 시간의 4시간 정도가 밀리는 경험을 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커피에는 내가 경험한 도시의 라이프 스타일이 꽤 잘 반영이 되어있다. 


내가 카페인에 예민하다 보니 커피 한잔을 마신다는 건 나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누군가 '커피 한잔 할래요?'라고 물어볼 때면 엄청난 내적 갈등에 시달리곤 한다. 수면 시간을 포기하더라도 이 사람과 맛있는 커피를 맛보며 추억을 만들지, 유명한 커피 집에서 굳이 다른 음료를 찾아 마셔 상대를 머쓱하게 할지 나에겐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특히 집에 초대되어 직접 에스프레소를 내려주시는 경우엔 더욱 곤란하다. 한번은 고민을 하다 도저히 안될 것 같아 거절을 했었는데, 왜 (오늘은)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지 이유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뺀 경험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커피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꼭 달콤 쌉싸름한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이 간절해진다. 특히 시애틀로 이사를 오고 나선 더 절실해졌는데, 이젠 커피 없이 시애틀에서 지낸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예 커피를 마시지 않던 남편도 시애틀로 이사 오고 나선 곧잘 마시게 될 정도.) 그 이유는 시애틀의 고약한 날씨 때문인데, 반년 넘게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하늘을 커피 없이 참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지 시애틀은 커피로 유명하기도 하고, 정말 맛있는 커피집이 많다.


대부분 시애틀 커피 하면 스타벅스를 떠올릴 텐데, 예상대로 정말 스타벅스가 많다. (한국 강남역만큼은 아니지만...) 다운타운을 걷다 보면 한 블록당 스타벅스 한 두 개는 쉽게 찾을 수 있고 그 외의 다른 로컬 브랜드들도 다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몇 군데 큰 커피 브랜드를 소개해보자면 시애틀 커피 웍스, 빅트롤라 커피 로스터즈, 카페 라드로 정도? (빅트롤라는 강력한 카페인을 자랑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다시 날씨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시애틀의 우중충함은 한국의 장마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거대한 장마 전선이 내려와 무서울 정도의 장대비를 시원하게 쏟아내고 하늘이 개는, 그런 드라마틱함이 없다. 왜 뱀파이어 영화의 주 무대가 워싱턴주인지 시애틀에 이사를 오고 나서야 온전히 이해했다. 절대 갤 것 같지 않은 두터운 잿빛 하늘에 얇은 우비 한 장으로 버틸 수 있는 정도의 가는 비가 몇 달이고 쉬지 않고 내린다. 이 날씨를 한 달만 경험해도 매일 아침 눈을 뜰 의욕 자체가 사라진다. 맛있는 커피 한잔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하루를 맨 정신으로 시작할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되는데, 나처럼 카페인에 예민한 사람은 이중고를 겪어야 한다.


비 오는 아침의 우울함을 버티고 제시간에 잠에 들 것인가?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하루의 우울함을 달래고 외로운 새벽 시간을 홀로 견뎌낼 것인가. 늘 커피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면 아침에 더 큰 우울함이 나를 덮쳐오기 때문에 최대한 커피를 참아내야 했다. 그렇게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찾아낸 적정선이 바로 2주에 한번 따뜻한 라떼를 마시는 것이다. 내 수면 스케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도 우울증으로 발전하지 않을 최소한의 커피 루틴. 어느 도시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커피를 즐길 테지만 내가 경험한 시애틀의 커피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물론 낭만도 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단순한 로맨스 영화 제목이 아니라는 것을, 이사 오기 전에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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