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런 세계에서 살았을까?
가슴과 머리에서 소용돌이 치며 나를 짖누르던 선과 악에 대한 파도가 잠잠해진다.
부와 가난에 대한 걱정과 공포심으로 요동 쳤던 머릿속이 초록빛의 청정하고 시원한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나를 둘러쌓던, 모든 시물레이션이 환하고 아무 것도 없는 화면으로 바뀌고, 귀를 막으면 막을 수록 크게 들리는 시끄러웠던 소음이 한 순간의 정적으로 멈추었다. 내가 살고 있던 사회는 시물레이션이었고, 나의 생각은 온갖 소음으로 차단을 해놨던 가상의 세계에 오류가 생겼다. 덕분에 작은 오류로 인해 객관적으로 나를 볼 수 있던 눈이 이동을 하여, 나를 둘러싼 세계까지 함께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세계는 이상하다. 누군가 개인적인 행복이나 성장을 위해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를 돈에 집착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여 변화를 시작하면, 아주 천천히 그에게 물들어 있던 검은색을 흡수하고 흰색을 급격하게 주입하여 소시오 패스로 만들어 버린다.
미디어는 한쪽에서는 소시오 패스가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 결과로 타인을 향한 공감력을 줄어들게 하고, 내가 원하는 목표로만 돌진하도록 만든다. 데일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은 다른 이들과 효과적으로 소통을 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내 감정을 숨기고, 내가 원하는 방향과 이익으로 타인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자기개발서를 따라하여 변화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소시오 패스,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피하라고 말을 한다. 내가 어떤 쪽에 발길을 들였느냐에 따라,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라며 욕을 할 수 있고, 또 다른 방향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 결국은 어느 것을 선택해도 비난만 받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심리학은 이 혼란을 부축이는 도구가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이해하려는 목적을 가졌지만 대중적으로 소비가 이루워지며, 다른 사람을 조작하는 방법으로 시작을 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에게 공포심과 두려움을 심어 주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소비를 부축이는 마케팅으로 연결이 된다. 이런 도구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흰색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검정색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흰색과 검은색을 오고 가기에 회색이 되어버렸는데 본인은 모르고 있다. 심리학이나 미디어, 자본주의가 이 색깔 놀이를 부추기면서 결국 사람들을 "회색"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를 보며, 환멸감에 비웃고 있지만 같은 회색이 된 나를 발견하고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다 모든 시뮬레이션이 꺼지며 그 색들이 녹아드는 허공으로 내 렌즈가 스며들었다.
1. 인간은 태어나고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2. 인간에게는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3. 현재의 많은 부분은 외부세계로부터 만들어졌다.
4. 우리는 각각의 렌즈를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 - 어떤 이는 평생 다른 기능을 써보지 못하고 한 초점만을 보며 살아간다. 줌을 당기거나 필터를 바꿀 수 있는데도, 그저 처음 주어진 기본 설정에 갇혀 세상을 흑백으로만 바라본다.
사람들은 죽음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천년만년 살것처럼 행동하며 괴로워 한다. 죽음의 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고를 설치하지만, 죽음은 황금으로 만든 금고 속에 있어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 오는 것인데, 그것을 두려워하며 싸우고 있다. 아이들을 봐라. 누군가 죽었다고 해도 그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지만, 어른들은 아이에게 죽음 공포에 대해 주입하고 싶어서 안달을 낸다.
우리의 머릿속은 외부 세계가 마구잡이로 앱을 깔아놓은 스마트폰 같다. 여러 국가를 나누어 놓고, 발전된 나라, 발전 되지 않은 나라로 이름을 붙이는 것도 위대한 인류가 한 짓이다. 과연 무엇이 발전이고 무엇이 쇄퇴인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몇 천년전의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배출하고, 졸리면 잠을 자야 하는 기계일 뿐이다. 이성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동물들과 다를것이 전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지만, 대단히 많은 것 처럼 외부세계에 의해 우리의 뇌에 세뇌되어 소비의 덫에 가두어 놓았다.
갑자기, 모든 시뮬레이션이 꺼진 후, 그 색들이 사라지는 지점에 내 렌즈가 옮겨갔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곳에 회색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세상은 결국 외부세계가 만든 허상에 불과 했다. 죽음조차 걱정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공에서 시작했고, 공으로 끝날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색을 채우려고 애를 쓸 필요가 있을까? 의식주의 욕구만 채우면 된다. 평생 쌓아 올린 모래성은 바람 속에 흩어질 것이다. 텅 비고 고요함 속에서,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의미를 마주했다. 나는 자연의 일부이고, 그 안에서 즐기다가 세상을 떠나면 되는 것 뿐, 내 인생의 의미? 굳이 거창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것은 자연으로부터 왔다. 햇볕, 땅과 물이 식물을 키우고, 그 식물을 먹고 곤충과 작은 동물이 자라고, 그 작은 동물을 먹고 큰 동물이 자란다. 그 후 다시 우리는 땅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땅에서 자라고 다시 땅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 속에서 모래성을 쌓고 춤을 추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 모든 자연이 이에 따르고 있는데, 왜 인간의 삶만이 이리 힘들게 만들어졌는가?
농부가 될까? 어부가 될까? 그것도 아니면 삼마니가 되어 볼까?
나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최소의 것을 소비하며 귀농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아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들이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아닐 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만 편안하자고 아이들을 이 요지경 세상에서 끌어내릴 자신이 없었다.
남편과 함께 귀농에 대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근데 웃기게도, 귀농을 해도 자연인이 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 때 나에게 렌즈에 대한 생각이 다가왔다. 우리는 각각의 렌즈를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럼 이 렌즈를 이용해서 공포와 불안감을 극복하고 편안하게 이 사회에서 중심을 잡으며 사는 것은 어떨까? 렌즈 설명서만 제대로 읽었어도 이 간단한 업데이트를 진작 했을 텐데, 젠장, 인류는 그걸 분실하거나 일부로 버렸나보다. 지금까지 혼자 스스로 깨우친 렌즈 활용법을 살짝 알려주자면, 힘든 일이 있거나 걱정 되는 일이 있을 때는, 렌즈를 축소 하여 나를 우주의 먼지로 보면 될 것이고, 집중해야 하거나 현재를 즐기고 싶으면, 렌즈를 확대 하여 내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나는 이를 반대로 하고 살고 있었기에 인생이 고달픈 것이었다.
나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렌즈임을 알아챈 순간이었다.
"너는 외부의 것들에 의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너의 판단에 의해 괴로워한다."
BY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