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환상 도서관 #8
온기암 정신병원 1과 이어집니다. (1편은 하단 링크 참고)
2편 시작
[6] 지하실
원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밖은 테니스 공이 만들어낸 대소동으로 시끄러웠지만,
원장실 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값비싼 가죽 소파와 양주 진열장, 벽에 걸린 대통령의 표창장.
나는 주저 없이 책장 뒤편의 비밀 금고로 다가갔다.
[Scan Complete. Hidden Door Detected.]
금고 다이얼을 특정 패턴으로 돌리자,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책장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 뒤에는 이 시대에 존재해선 안 될,
매끄러운 크롬 재질의 엘리베이터 문이 번쩍이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나는 깊고 어두운 지하로 향하는 입구에 발을 들였다.
하강은 빨랐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띵.
문이 열리자, 차갑고 멸균된 공기가 훅 끼쳐왔다.
그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타일 바닥 대신 스테인리스 스틸이 깔려 있었고,
천장의 LED 조명이 수술실처럼 하얗게 빛났다.
복도 양옆의 유리 벽 너머로 끔찍한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고양이의 척추에 전선을 연결해 둔 수조,
뇌가 드러난 채 꿈틀거리는 알 수 없는 생체 조직들.
“쥐새끼 한 마리가 기어들어 왔군.”
복도 끝을 막아선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병원에서 본 적 없는 여자 간호사였다.
선명한 이목구비에 진한 화장을 하고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 아래로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승모근이 목을 감추고 있었고,
양팔은 핏줄이 불거진 거대하고 다부진 근육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Threat Assessment: Enhanced Human (Grade C).]
[Lee Seon-ho Body Status: Critical Weakness.]
제임스의 전투 시스템이 경고음을 울렸다.
정면승부는 자살행위였다.
이 나약한 몸뚱이로는 스치기만 해도 골절이다.
“크어어!”
여간호사가 황소처럼 돌진해 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옆으로 굴렀다.
그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자,
콘크리트 벽에 금이 갔다.
‘도구를 써야 해.’
나는 바닥을 굴러 수술 도구 트레이를 엎었다.
메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다시 달려드는 순간,
나는 그의 허점을 파고들어 아킬레스건을 그었다.
“끄아악!”
놈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깊지 않았다.
근육이 너무 두꺼웠다.
나는 옆에 있던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안전핀을 뽑고 놈의 얼굴에 분사했다.
하얀 분말이 시야를 가렸다.
놈이 괴로워하며 허우적거리는 틈을 타,
나는 소화기 몸통으로 놈의 후두부를 전력으로 가격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구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손을 덜덜 떨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나는 계속해서 가장 안쪽의 메인 실험실로 향했다.
거대한 원통형 배양관들 사이로,
흰 가운을 입은 원장이 보였다.
그녀는 주사기를 자신의 목에 꽂은 채 나를 돌아보았다.
주사기 속의 푸른색 형광 물질(정제된 청해광상)이 그녀의 혈관으로 주입되고 있었다.
“응? 선호군! 좋은 아침? 근데 왜 여기 있지?"
“아침에 작은 소란이 났다고 하는데, 너가 한 짓이야?!”
우드득. 콰직.
끔찍한 소리가 원장의 몸에서 나기 시작했다.
의사 가운이 내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팽창하는 근육에 피부가 견디지 못하고 젖은 휴지조각처럼 찢겨나갔다.
“크아아악!”
찢어진 피부 틈새로 선홍색 생고기 같은 근육 다발이 꿀렁거리며 튀어나왔다.
그 위로 푸른색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턱뼈가 탈골되듯 벌어지며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 돌출되었다.
-
괴물이 된 원장이 네 발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나는 겨우 몸을 피했지만,
놈의 앞발이 스친 어깨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크윽!”
극심한 고통에 눈앞이 하얘졌다.
이선호의 몸은 한계였다.
정면 대결은 불가능하다.
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 시선이 실험실 한쪽에 위치한 거대한 산업용 소각로를 향했다.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리는 입구가 보였다.
나는 소각로 쪽으로 달렸다.
괴물이 침을 흘리며 내 뒤를 쫓았다.
나는 소각로 바로 앞에서 급정거하며 몸을 돌렸다.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바닥에 노출되어 있던 고압 전선을 놈의 발밑으로 걷어찼다.
파지지직!
푸른색 전기 스파크가 튀며 괴물의 몸이 일시적으로 경직되었다.
“지금이야!”
나는 남아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경직된 괴물의 몸통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놈의 거대한 몸뚱이가 중심을 잃고
소각로 입구 안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즉시 소각로 문 옆의 레버를 당겼다.
쾅!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키에에에엑―!”
끔찍한 비명소리가 철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것은 인간의 비명이 아니었다.
수천 도의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가는 괴물의 절규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점점 변해갔다.
처음엔 사람의 비명이었던 것이,
점점 날카롭고 가늘어지더니...
“냐아아아앙! 이야아아옹―!”
그것은 수천 마리의 고양이가 동시에 울부짖는 소리였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Target: Director. Status: Terminated.]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실험실 가장 안쪽,
원장이 지키고 서 있던 자리에,
칠흑같이 어두운 또 하나의 통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닌 건가,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어…
나는 피 묻은 입가를 닦으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7] 리미널 스페이스
철컥.
등 뒤에서 육중한 문이 닫혔다.
순식간에 소음이 차단되었다.
소각로에서 타오르던 괴물의 비명도,
테니스 공이 만들어낸 광란의 소음도,
1980년대의 습하고 끈적한 공기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을 보았다.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내 운동화가 밟고 있는
바닥의 질감이 또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끄러운,
순백색의 합성수지 타일.
“하… 하…”
내 숨소리가 낯설게 울렸다.
메아리가 없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
멸균실 특유의 무취.
콧속 점막이 말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만큼은 1982년이 확실히 아니다.
적어도, 그 시대의 기술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공간이었다.
-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가 뻗어 있었다.
천장과 바닥,
벽면이 너무 하얘 눈이 시릴 정도로였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완벽한 간접 조명.
원근감이 사라진 탓에,
저 끝이 100미터 앞인지 10킬로미터 앞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발소리만이 유일한 청각 정보였다.
걸어도 걸어도 풍경이 바뀌지 않았다.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한 감각.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것 같기도 했고,
멈춘 것 같기도 했다.
이곳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틈새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Warning: Spatial Distortion Detected.]
[Time Dilation: 0.04%...]
시스템 로그가 내 시야 구석에서 깜빡였다.
‘1982’라는 연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계속 바뀌었다.
2034, 2021, 2093, 2046, …
이곳은 확실히 여러 시간대의 좌표가 교차하는 웜홀 같은 공간이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눌려 있는 이선호의 자아가 시공간의 뒤틀림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벽을 짚었다.
차가웠다.
‘거의 다 왔어.’
나는 비틀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얀 벽면 너머로 미세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웅― 웅―.
그것은 거대한 서버실의 냉각 팬 소리 같기도 했고,
심해 잠수함의 엔진 소리 같기도 했다.
-
얼마나 걸었을까.
영원처럼 느껴지던 백색의 터널 끝에,
마침내 검은색 문 하나가 나타났다.
손잡이도,
잠금장치도 없는 매끈한 흑요석 같은 문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문 위쪽의 센서가 붉게 빛났다.
[Access Request...]
[Bio-Scan: Subject James (Lee Seon-ho body).]
[Authorization: Confirmed.]
피슈우웅―.
공압식 실린더가 작동하며 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문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인공조명이 아니었다.
자연광.
그것도 아주 강렬한 태양 빛이었다.
그리고 소리.
쏴아아아― 철썩.
파도 소리였다.
나는 홀린 듯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말도 안 돼.”
내 눈앞에 펼쳐진 곳은,
지하 벙커도 실험실도 아니었다.
사방이 통유리로 된,
초고층 빌딩의 펜트하우스였다.
발아래에는 최고급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모던한 디자인의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은은한 에스프레소 향과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를 압도한 것은 창밖의 풍경이었다.
창밖에는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과,
끝없이 펼쳐진 검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절벽 위에는 1980년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선형의 은색 타워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Location Updated: Blue Sea Corp. Headquarter.]
[Current Era: Simulation Year 204X.]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걸어 나온 문은,
펜트하우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평범한 그림 액자 뒤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헝클어진 입은 채,
21세기의 럭셔리한 집무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치 흑백 영화 속의 인물이 컬러 TV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이질스러운 부조화가 주변을 감돌았다.
“어서 오게.”
창가 쪽, 휠체어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노인이 천천히 휠체어를 돌렸다.
역광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8] 푸른 광선
“청해광상에 대한 정보를 가지러 온 건가?"
노인은 휠체어를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섞인 회색의 머리가
깔끔한 가르마와 함께 정리되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청해광상은 고통을 느끼는 포유류가 심해 바닷물과 상호작용하여
척수에서 나오는 푸른 결정을 정제해서 만드는 연료이지."
노인은 마치 인간 세계에 싫증이 난 신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나에게 말을 하곤 있었지만,
시선은 창 밖의 한 곳을 째려보듯 흘기고 있었다.
"청해광상은 아직 그의 가능성이 모두 연구되지 않은 엄청난 물질이야.
기술과 마법을 이어주는 문명의 마지막 퍼즐이라 할 수 있어."
”청해광상 연구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연구야.
극심한 고통을 느낄수록 척수에서 많은 푸른 결정을 만들어내지."
"그래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네.
처음에는 신체적인 고통이었지.
매우 갖가지의 고문을 통해 극심한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쉬웠지만,
지속성이 문제였어.
극심한 신체적 고통은 쇼크를 필연적으로 유발하기에
너무나 빨리 쇼크사로 죽는 실험체들이 너무 많았지.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 고통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네.
정신적 고통은 신체적 고통보다 한계가 없으면서
고통을 느끼는 개체가 쇼크사로 죽을 일이 없지.
뭐 잘못하면 정신병에 걸리긴 한다만."
"말이 길었네, 제임스. 하지만 너는 미션을 성공하지 못할 거야."
-
회장이 왼 손을 가볍게 가슴 한 가운데를 지그시 눌렀다.
그의 온 몸이 갈라지며 기계로 점철된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꿈은 여기서 끝이네, 409호.”
위잉―
회장은 기괴하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입 안에서 푸른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피할 새도 없었다.
푸른 파장이 번쩍임과 동시에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Warn... ing... Sys... tem... Cri... ti...]
시야에 떠 있던 정보창들이 창이 심하게 요동쳤다.
붉은색 경고 문구가 뜨려다 말고,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깨져버렸다.
[Connec... tion... Lo... st...]
[Re... bo... ot... Fai... l...]
팟.
마치 전원이 나간 TV처럼,
눈 앞이 까맣게 꺼져버렸다.
임무 목표도, 남은 시간도,
눈 앞의 대상의 정보를 나타내는
상태창도 사라졌다.
동시에 펜트하우스의 대리석 바닥,
눈부신 바다도, 은색 타워도,
회장의 모습도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커헉!”
나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코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대리석이 아니었다.
축축하고 곰팡이 냄새나는 바닥이었다.
[9] 봉사반장
“일어나! 이 새끼가 약 기운 떨어지니까 또 자빠져 자네?”
둔탁한 군홧발이 내 옆구리를 걷어찼다.
익숙한 목소리.
수간호사 박 씨였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펜트하우스는 없었다.
나는 온기암 정신병원 복도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내 손목에는 은색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박... 간호사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는... 저는 사실… 중요한 작전 수행 중이었습니다!”
내 외침에 박 씨와 주변에 있던 남자 직원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배를 잡고 낄낄대기 시작했다.
“작전? 푸하하하! 야, 이선호. 너 진짜 가지가지한다. 네가 무슨 007이야?”
“이거 놔! 난 간호사야! 당신 직속 부하라고! 열쇠 내놔!”
내가 발버둥 치자 박 씨가 혀를 차며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복도 벽에 붙어 있는 전신 거울 앞으로 나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똑바로 봐, 인마. 네 꼴을 좀 보라고.”
나는 거울을 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남자는 깔끔한 흰색 가운을 입은 요원도 아니었고, 간호사도 아니었다.
누렇게 뜬 얼굴, 퀭한 눈, 며칠은 감지 않은 떡진 머리.
그리고 무릎이 다 늘어난 낡은 환자복.
그리고 결정적으로, 왼팔에 채워진 낡은 노란색 완장.
그 위에는 검은 매직으로 삐뚤빼뚤하게 [봉사반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아...”
“너가 망상증이 있는 환자이지만,
'형제복지원' 짬밥이 좀 있어서 봉사 반장을 시켜줬더니,
진짜 네가 서울 명문대 나온 간호사인 줄 알았냐?
좀 어울려줬더니 이제 망상증이 더 심해졌구만, 응?”
박 씨가 내 완장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기억이 뒤틀렸다.
내가 자유롭게 스테이션을 드나들 수 있었던 것,
환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
그건 내가 간호사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노릇을 하는 ‘환자 반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이건 조작이야... 회장이... 청해광상 레이저 빔을...”
“옘병, 또 헛소리. 야, 얘 옷 갈아 입히고 독방에 처넣어.
정신 차릴 때까지 밥도 주지 마.”
-
쾅!
철문이 닫혔다.
1평 남짓한 독방의 어둠이 나를 삼켰다.
빛이라곤 문 아래 틈새로 들어오는 희미한 복도 불빛뿐이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본부! 응답해! 409호다! 긴급 상황 발생! 탈출 경로 분석해!”
정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 시야에 떠올랐을 텍스트,
[Processing...]이나 [Analyzing...] 같은 문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보국? 누구든 대답해 봐! 여긴 제임스야! 제발!”
내 목소리만이 좁은 독방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완벽한 고립.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기계음과 데이터의 흐름이 끊기자,
그 빈자리를 견딜 수 없는 공포가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 눈을 비비고, 머리를 벽에 찧었다.
다시 켜져라.
다시 보여라.
제발.
나에게 다시 응답해줘.
...
-
시스템이 사라진 뇌의 빈 공간으로,
더러운 먹물 같은 기억들이 역류해 들어왔다.
그것은 ‘제임스’의 기억이 아니었다.
‘이선호’의 기억이었다.
“반장, 신입 애들 좀 밟아놔.”
“네, 알겠습니다. 원장님.”
어린 시절,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원생들을 구타하던 내 손.
밤이면 관리자들의 방으로 불려가 끔찍한 짓을 당하고,
울면서 돌아와서는 화풀이로 더 약한 아이들을 때렸던 나.
살기 위해서는 권력과 폭력에 넙죽 엎드렸지만
그런 자신을 잊기 위해, 그리고 미치지 않기 위해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믿어야만 했던 나.
‘아니야. 난 409호야. 난 미래에서 왔어. 세상을 구하러...’
나는 무릎을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다.
내가 망태 할아버지를 발로 찼던 기억,
과현미 환자의 인형을 뺏어서 던졌던 기억.
‘내가... 내가 만든 거야? 제임스는... 내 망상이었다고?’
속이 메스꺼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제임스, 청해광상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미쳐서 발작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독방 바닥을 구르며 어둠 속에서 홀로 비명을 질렀다.
[10] 에필로그
2002년 6월.
하지만 흑묘산 기슭,
온기암 정신병원의 시간은 여전히 1982년에 멈춰 있었다.
곰팡이는 벽지를 갉아먹고 있었고,
쇠창살은 녹슬어 붉은 녹물을 흘렸다.
복도에는 지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고여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수간호사 박 씨의 머리가 좀 더 벗겨지고 배가 더 나왔다는 것뿐.
-
휴게실 구석.
햇빛조차 들지 않는 가장 어두운 자리에 한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20년 전, 병원을 뒤집어놓으며 '미래에서 온 요원'이라 자칭했던 이선호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에서 일말의 총명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
하얗게 센 머리카락,
초점이 나가 탁해진 눈동자.
그는 실제 나이보다 2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더러운 걸레가 들려 있었다.
스윽... 싹... 스윽... 싹...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닦고 있었다.
털이 다 빠져 반들반들해진,
낡은 테니스 공이었다.
“야, 저 영감 또 시작이네.”
“건들지 마. 우주 닦는 중이시라잖아. 킥킥.”
새로 들어온 젊은 간호사들이 그를 보며 비웃었지만,
이선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이선호는 닦고 있던 테니스 공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형광등 불빛을 받은 공이 그의 눈에는 마치 작은 행성처럼,
하나의 우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공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 괜찮아. 내가 더럽고 비참할수록 더 좋은 거지.”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미치광이의 헛소리라기엔 너무나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그만의 이상한 신념이었다.
“우주는 균형을 맞춰야 하거든.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행복과 불행의 총량도 정해져 있어.”
그는 공을 자신의 뺨에 비볐다.
차가운 고무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우주에서는 내가 실패하고,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다른 차원의 우주에 사는 제임스들의 인생과 균형이 맞춰지는 거야.”
그의 눈앞에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임무를 성공한 멋진 제임스.
그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푸른 바다.
최첨단 빌딩.
그 모든 것이 저 작은 테니스 공 안에 들어있다고,
그는 믿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 들리지? 난 괜찮아.
여기서 평생 썩어도 좋아.
대신 거기선 꼭 행복해야 해.
내가 짊어진 불행만큼.”
그의 논리는 끔찍한 현실을 버틸 수 없어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그는 스스로가 처한 우주가 '실패작'이라 규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고통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
“이선호 씨! 점호 시간입니다! 뭐 해요?”
간호사가 소리쳤다.
이선호는 화들짝 놀라며 공을 품에 안았다.
그는 주섬주섬 옆에 있던 낡은 망태기를 집어 들었다.
그가 깨끗해진 공을 망태기 안에 넣었다.
망태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수십 개의 테니스 공이 가득 차 있었다.
20년,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그가 닦아온
수많은 '평행우주'들이 망태기 안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굽은 등, 낡은 환자복,
그리고 한 손에 든 거대한 망태기.
복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실루엣은 20년 전,
'망태 할아버지'와 똑같았다.
“갑니다... 우주들을 짊어지고...”
이선호, 아니 새로운 망태 할아버지가 절뚝거리며 병실로 향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또다시, 자신처럼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금발의 젊은이가 들어오기를.
그때가 되면 이 공을 건네주리라.
너의 실패는 헛된 게 아니라고.
우리가 여기서 지옥을 견디는 덕분에,
어딘가의 우리는 행복하고 멋있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딸깍.
병동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테니스 공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2편 끝)
매주 토요일, 새롭고 기발한 이야기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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