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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Sep 13. 2021

찰밥 한 그릇에 수다는 세 그릇

“○○네 아들은 베트남 여자와 결혼을 했는디. 아야 인사도 잘하고 이쁜디 아들도 낳았당께.”

“일본에서 살다 온 여자는 먹을 것을 들고 자주 회관에 나온당께.”

“식당에라도 가먼 운전을 할 줄 앙께 그이가 몇 번 왔다 갔다 실어 나르제. 고맙제잉”

“느그 아버지의 갑계원인 ○○양반이 돌아가셔부렀어야. 인젠 느그 아버지만 남았당께”

“당숙모는 아파서 딸네로 갔다드만. 아이고.”

“느그 외삼춘은 어디가 아팠는지 병원에 댕겨왔다드라.”

“우리는 느그아버지, 나 둘이가 농협 조합원잉께 이번엔 큰 설탕이 두 푸대나 나왔어야. 느그 한 푸대씩 갖고 가그라잉”

“올해는 농협에 맽겨서라도 농사를 지었응께 직불금도 받았제. 내년에도 또 지어야쓰겄다.”         

울엄니 길심씨의 수다에 나는 앉아서도 동네 돌아가는 속을 훤히 안다.


그녀의 수다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늘어간다. 자연의 순리인가 싶다. 나도 딸들 앞에서는 그럴 때가 많아지고 있다. 길심씨는 딸이든 사위든 옆에 앉으면 동네 이야기, 농사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처음 들으면 몰랐던 사실을 알기도 하고 새로운 사실에 흥미가 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들었던 이야기이다. 언젠가부터는

“응, 엄마. 지난번에 이야기했잖아.”라고

“아, 그 이야기.”

하며 들었던 체를 하지만 그래도 길심씨의 이야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진다. 그래서 길심씨의 딸들은 중간에 자르기도 하고 때로는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위들은 한쪽 귀는 다른데 두고 한쪽 귀는 어머니 이야기를 듣는 척 건성으로 대답만 하기도 한다.  

     

몇 년 전, 큰딸아이가 대학시절 친구들과 넷이서 목포여행을 다녀왔다. 마침 목포와 영암은 가까우니 할머니 집으로 숙소를 정해야겠다고 했다. 그 당시 동생네와 우리는 아이들도 몸집이 커져 시골집이 너무 좁고 오래된 집이라 마당 한 편에 펜션 같은 아담한 예쁜 집을 새로 지었다. 이리하여 우리 시골집은 한 마당, 두 집이 된 것이다. 하나는 헌 집, 다른 하나는 새집이다. 딸아이는 새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친구들을 데리고 숙박비도 아낄 겸 할머니 집에서 2박을 했다.


여행 첫날, 목포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할머니 집에 도착했단다. 길심씨는 서울에서 온 손녀의 친구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말이 끊이지 않았다. 딸아이는 피곤해서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누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단다. 자다가 일어나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세 친구가 잠이 들어 있는 동안 한 친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느라 눕지도 못하고 어정쩡 앉아서 벌을 서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단다. 할머니가 어떤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더니 딸아이는 대부분 길심씨의 딸, 내 자랑에 동네 이야기였단다. 한 친구는 알지도 못하는 동네 이야기며 친구 할머니의 딸 자랑에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길심씨의 수다 사건 중에 가장 재미있는 사건으로 기억한다. 길심씨가 누구인가? 수다만으로 끝이 났을까? 아니다. 손녀들의 눈치에 헌 집으로 건너간 길심씨는 아이들에게 다음날 아침밥을 먹이기 위해 찹쌀을 씻어 놓고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길심씨는 대추, 밤 등 농사지은 갖가지 콩도 삶고 불려놓은 쌀에 참기름, 설탕, 간장, 소금 간을 더하여 고루 섞은 다음 아궁이 솥단지에 시루를 얹어 찰밥을 쪘다. 아이들을 위하여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던 것이다.     


아침밥상을 차려 놓고 아이들을 깨우니 이 청춘들이 모두 다 아침은 안 먹는다고 했단다. 그래도 할머니가 너희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먹어보라 권하니 눈 비비고 마지못해 예의상 밥상에 앉았다. 그런데 어라! 밥을 먹다 보니 모두 너무 맛있어서 큰 밥그릇에 담긴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말았단다. 찰밥과 함께 할머니가 참기름 발라 아궁이에 구워준 김을 싸 먹으니 너무너무 맛있었단다. 나는 그날의 찰밥 이야기를 말로만 들은 이야기지만 얼마나 맛있는지는 너무나도 잘 안다. 길심씨의 찰밥과 아궁이에 구운 김은 찰떡궁합이다. 아침은 늘 안 먹는다던, 잠을 더 자겠다던 아이들이 한 그릇을 다 먹었다면 알만하다.     


그로부터 딸아이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가장 맛있는 밥으로 할머니의 찰밥을 꼽게 되었단다. 딸아이는 친구들이 만나면 가끔씩 할머니의 찰밥을 다시 먹고 싶어 그리워한단다. 길심씨의 음식에는 마법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먹고 나면 그리움으로 남게 되니 말이다. 도시의 아이들이 할머니가 아궁이 솥단지에 시루를 얹어 찐 찰지고 고슬고슬한 찰밥을 언제 먹어보았겠는가. 할머니의 수다가 세 그릇은 되었겠지만 찰밥 한 그릇을 이길 수는 없었다. 길심씨의 음식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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