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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이해 Dec 26. 2015

멋진여자는 일을 사랑한다.

<멋진여자가 되려면> Chapter 3

3. 멋진 여자는 일을 사랑한다.

“야! 자냐? 

텔레비전을 볼 거면 보고 잘 거면 끄고 자~”


엄마가 발가락으로 내 허리를 꾹꾹 누르시며 말씀하셨다. 


“아니야, 보고 있어~ 끄지 마!”


TV: 나는 타고난 예술가예요! 

(I was born to be an artist!)


‘응? 뭐지? 누구야?!’

꾸벅꾸벅 졸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였다. 

저 할머니 누구지?


윌라 킴 | 뉴욕 브로드웨이 현역 의상 디자이너  

 

미국에서 일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전공 분야는 다르지만 막 취업에 성공해 엄마의 눈치 밥에서 드디어 벗어난 어느 날 KBS 1TV에서 하는 추석기획 다큐 공감 채널을 보게 되었다. TV를 틀어 놓고 졸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어느 할머니가 나오셔서는 “I was born to be an artist!” 라고 외치면서 내 가슴을 후벼 파셨다. 미국 최고의 브로드웨이 현역 무대 예술가이신 한인 교포 윌라킴(Willa Kim)이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팠던 말은 자신이 예술가가 되는 대신 금융계통에서 일했다면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생긴 학자금도 갚아야 하고 돈이 들 곳이 많아 어디라도 빨리 취업해야 했던 때였기 때문에 윌라킴(Willa Kim) 할머니가 말씀하신 그 금융분야에서 일을 막 시작한 때였다. 그 TV 속 화면에서의 윌라킴(Willa Kim)의 말은, “너 지금 뭐 하고 있니?” 라며 정신을 차리라는 듯 손가락을 가리켜 바로 나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렸고, 그날만큼은 꿈이 아닌 생활을 위해 금융분야에 다시 취업한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채’가 있는 ‘멋진 여자’는 어쩐지 더욱 부끄러운 말 같았기 때문에 취업한 후 학자금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금 처해 있는 이 상황을 견뎌야 하겠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점점 화면 속 윌라 킴 할머니가 주신 교훈,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말씀을 드디어 지킬 수 있는 때가 오고 있다.


내 친구들은 결혼 적령기에 결혼해 모두 남편을 내조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으레 나도 그런 삶을 살겠거니 생각했지만 현재의 내 삶은 그들의 삶과 많이 다르다. 아이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집중하지 않아도 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솔로의 생활이 다행히도 아직 내게 있다.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나가려면 수입이 필요하고, 혹시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커리어는 계속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남편 혼자서는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나라에서 70~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그 당시 가장이 혼자서 벌어도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무척 어렵게 되었다.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주택 자금 대출 이자, 오르는 금리, 생활비, 육아 비용 및 자녀의 교육비를 한 사람이 감당 하기에는 꾸준히 오르는 물가에 비해 근로자들의 급여가 오랫동안 오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사랑하지만 나에겐 두 가지의 철칙이 있다. 야근을 하지 않는 것과 불필요한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당시에는 벤처 회사였지만 현재는 제법 규모가 커진 OO파크라는 회사에 입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어린 나는 나보다 직급이 높으신 분들이 퇴근하지 않으시면 집에 갈 수 없었다. 이것은 비단 내가 속했던 조직이 아니더라도 어느 회사든 한국 사회라면 으레 있는 일이고 아직도 몇몇 회사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시간 계획을 잘 세워 퇴근 시간에 업무를 다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는 것이 사무실 분위기상 눈치가 보였다. 어떤 날은 친구와 저녁 약속을 만들고 식사를 한 뒤 다시 업무에 복귀해서 상사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퇴근하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한 소리를 들을까 하는 염려에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가방을 그대로 두고 퇴근한 날도 있었다.


나는 퇴근 후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취미 생활, 운동, 친구 만나기, 데이트하기 등등 하고 싶은 것이 많았음에도 사회 초년생이 갖추어야 하는 눈치 게임으로 원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던져 주는 일거리에 자정을 넘어 총알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날도 많았다.


어떤 날은 사이트 개편 때문에 팀원들과 몇 날 며칠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이러한 삶은 내가 추구하는 삶과 정반대의 삶이었다. 몇 년이 지나 이직을 하면서, 더 이상 야근과 회식에 타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다행히 야근을 하면 제시간에 자신의 업무를 끝내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드디어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외국에서의 경험도 잊지 못한다. 나는 뉴욕의 어느 한국계 회사에서 통계 자료를 수집하고 디자이너로도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회사는 직원 중 50%는 한국인, 나머지 50%는 미국 시민권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퇴근 시간인 6시가 되면 미국인들에게는 “good night”이라는 인사를 하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너는 한국 사람이잖아! 왜 이렇게 일찍 퇴근해?” 라고 말했다. 한국이 아닌 노동법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외국에서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 관리자에게 역차별을 당한 것이다. 가중되는 업무와 뉴욕이라는 도시의 삭막함, 살을 에어 낼 듯이 몰아치는 추위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이렇게 힘들었던 시기 또한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들이었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때 행복한지 알게되었다.


따라서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나 자신과 한 약속은 앞으로 불필요한 야근 및 회식을 내 삶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이제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이도 되었고 내 건강을 스스로 챙겨야 할 의무감도 있었기 때문에 업무는 할 수 있을 만큼만 하되, 무리하지 않고 퇴근 이후의 시간은 회식보다는 오로지 나에게 초점을 맞춘다.


서점에 가 책을 읽거나, 필요한 공부를 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운동을 한다. 생각해 온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남을 도울 기회들도 찾는다. 일을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시간도 공존해야 하기 때문에 이 두 시간들을 하루 안에 모두 담아내야 한다.


아무리 가슴 뛰는 일을 해도 무리하면 결코 즐겁지 않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행복하게 일하며 자신이 목표로 한 시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모든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


무대 의상 디자이너 윌라킴(Willa Kim)은 자신은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며, 다만 자신은 뉴욕에 살고있는 아티스트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계속 일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은 첫째, 자신이 가진 재능을 믿었고, 둘째, 자신의 페이스 조절을 했기 때문에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어진 시간 중의 70% 정도를 조사하고 분석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주어진 극의 시대 배경과 극 중 배역의 성격, 직업, 취향 등을 분석하고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늘 시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저는 준비 시간이 짧게 주어지면 아예 일 자체를 거부합니다. 뮤지컬이든 발레든 무대 의상은 그냥 의상이 아니지요. 배역을 통해 그 극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겁니다.”


가끔 지인들은 내게 무상으로 각종 디자인 작업을 부탁해 올 때가 있다. 그동안 내가 살면서 받은 사랑과 도움이 많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돌려드리려 개인적으로 봉사를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가끔 너무 무리한 부탁을 받을 때도 있다.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 큰 프로젝트를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맡겨 버린다거나, 네가 하면 금방 하니까 빨리 해 달라고 보챈다거나 할 때 속상하다. 나도 사실 이 할머니처럼 뭔가 만들어 낼 때 상당한 시간을 조사 및 분석의 기간으로 잡기 때문이다. 물론 분야는 다르지만 뭔가 생산을 할 때 결과물이 잘 나오려면 분석의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주제에 맞는 무언가가 나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가 배경인 게임 디자인을 기획하려면, 그 시대에 맞는 배경 화면 즉, 중세시대 건축 양식, 가구 스타일, 시대적 의상, 액세서리, 도구, 무기(화살, 검) 등등 여러 가지가 현대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조사 및 분석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할머니의 의상 디자인도 마찬가지이겠지.


어쨌거나 아무렇게나 막 만들지는 않는다. 시대적 배경에 맞게 고증을 한 뒤 만들어 내야 하니까 말이다. 앞 장에서 언급한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역사를 탐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와 통한다. 두 번 일을 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은 계획형 디자이너인 나는, 수정하는 데 시간을 덜 보내려면 이 분석의 기간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하다. 편집 디자인이라면 의뢰인은 먼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문구를 넣고 싶은지 꼭 정리를 하고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바로 레이아웃 때문이다.


이미 의뢰받은 문구로 디자인을 다 해 놓았는데 추가로 무언가를 넣거나 빼야 할 때 레이아웃의 방향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에 디자인 전체를 새로 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고, 흐트러진 구성을 바로잡아야 하는 고민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처음 작업할 때보다 더 걸리는 경우도 있다. 남들은 이 작은것 하나 넣는 데 뭐 그렇게 깐깐하게 구느냐고 묻겠지만, 들어는 보셨겠지.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라고.


정말 잘 된 디자인이라면 한 번에 모든 것이 딱딱딱 잘 맞아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의뢰하는 사람과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손발이 척척 맞아야 하기 때문에 극히 드물고, 거의 대부분은 여러 번의 디자인을 보고하고 수정 하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이런 시간들을 줄이려면 내 쪽에서는 여러 번 확인을 하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같은 일을 두 번 이상 반복하며 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어쩌면 편집 디자이너의 길로 잘못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자인이 아닌 글 쓰는 작업을 시작해 보니 이것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탈고의 과정이 있으려면 원글을 쓰고 읽어 보고 고치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도 똑같지 않을까? 경험으로 배운다고 하는 우리네 인생이, 가다가 그 길이 아니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나도 경험으로 배운 일, 즉 불필요한 야근과 회식을 하지 않는다는 나만의 철칙을 세웠으니까 그래서 나만의 길을 가겠다고 결정했으니 참 다행인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지킨다.

언제나 건강에 무리가 갈 정도의 업무는 옳지 않다.

마음에서 나오는 따뜻한 소리를 듣고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느껴본다.



*이 글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 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가공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수정일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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