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되었던 신경 정신과 첫 상담을 무사히 마치고 다음 상담을 예약했다. 상담 후 병원 문을 나설 때 잠시 호흡이 돌아왔던 기억이 너무 좋아 몇 번 더 다니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다. 궁금했다. 어떻게 의사 선생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호흡이 돌아왔던 건지... 아마도 속에 있는 불편한 고민들을 털어놓음으로써 순간적으로 스트레스가 약간 해소된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번에는 큰 결심을 했다. 바로 약을 타기로 한 것이다. 약을 빌려서라도 하루빨리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질식의 고통이 하루종일 느껴지면 일상이 망가진다. 하지만 약물처방에 대한 두려움도 있긴 했다. 약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사실, 약을 처방받고 있는 모습을 보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 약은 약국이 아닌 병원에서 제조되어 약국에서 정신과적인 약을 처방받는 두려움은 조금 덜 수 있었다. 2000년 당시에는 항우울제 같은 중추신경계 약물 처방과 판매 등은 의약분업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약이 좀 셀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식사 후에 먹어야 해요~" 카운터에서 한 번 더 당부했다.
처방받은 날 저녁, 식사 후 곧장 약을 한 입 털어 넣었다. 투약 후 초기에는 별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 호흡도 여전히 불안정했고, 질식의 고통도 계속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잠이 든 건지 기억을 나지 않지만, 숨을 몰아쉬고 자세를 여러 번 바꾸다 겨우 잠이 들었다. 딱 하나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원래 자다가도 숨이 차서 계쏙 깨곤 하는데 이번에는 한 번도 깨지 않았던 것이다.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나다는 게 이런 느낌일 것이다. 잠을 깨지 않으니 개운하게 잘 잤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고 싶은데, 부작용 같은 것도 분명 존재했다. 이걸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복용 후 증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약을 처음 복용한 다음 날부터 식욕이 사라졌다. 침을 삼키거나 음식, 물을 삼킬 때 하악, 그러니까 아래턱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0.8배속으로 움직인다고 해야 되나? 그리고 입 안에서 특이한 냄새가 느껴졌다. 머리는 살짝 어지러웠고, 무엇보다 숙취상태의 느낌이 매우 강했다. 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은 낮잠을 잔 후 점심때 즈음이 되어서야 사그라들었다.
며칠 더 약을 복용해 보니, 하품이 계속 나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하품을 했다. 하품을 한다는 것은 피곤하다는 것인데, 피곤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하품이 나왔다. 그리고 아주아주 특이한 것이 하품을 하고 나 이후에 웃음이 강제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하품 이후에 나오는 웃음은 내가 웃겨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내 감각과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거북한 느낌이었다. 하악이 간지럽혀지는 느낌이 동반되었다.
세 번째 상담도 진행되었지만 약은 잠시 끊었다. 호흡곤란 증상 역시 사라지지 않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우울한 감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안타깝게도 상담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가족들도 호응해 주지 않아 같이 상담을 받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호흡곤란 증상은 일단 가지고 살아가면서 차차 원인을 찾아 치료해 보기로 했다. 신경정신과에서도 호흡곤란에 대한 원인을 정확히 규명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할 수 없다고 하니, 나도 어떻게 방법이 없었다. 교통사고로 가슴을 부딪혀서 후유증이 남은 거 아닐까라고 하는데... 글쎄다.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군입대를 앞두고 있어 치료를 하지 않으면 나의 앞길이 계속 꼬일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는 병역 4급 판정을 운운하며, 입대를 만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하게 군복무를 마치고 싶었다. 군복무를 하지 않으면 아버지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몇 개월 뒤...
호흡곤란은 여전했지만, 우울증은 많이 회복되었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사람도 만나면서 어느 정도 회복기에 들어간 것이다. 호흡곤란에 대한 치료는 여전히 찝찝했지만, 이대로 입대하면 꽤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어딜 가나 적응을 잘하는 편이고, 낯선 사람들과도 빠르게 친해지는 MBTI로 치면 극 E의 성향이었기 때문에(우울증 때문에 I로 바뀔 뻔) 걱정도 덜 했다.
하지만 자대에 배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