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수 자충수 무리수 꼼수 묘수 ... 신의 한 수?
최근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며칠 전 악몽을 꿨다. 2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적어보는 글.
꿈에서 나는 할 말 다하며 엄청나게 따져댔다. 그동안 수천수만 번을 속으로 곱씹었던 말들을 다 쏟아냈다. 마치 나의 모든 불행이 선생님 때문인 양, 초라해 보이는 내 삶을 속속들이 다 들킨 느낌이었다.
디즈니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뚝 떨어졌던 이상한 나라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그 와중에 조용한 카페에서 이야기 하자며 커피를 마셨고, 선생님께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다. 그리고 남겨진 나는 이상한 나라의 지하철 역 같은 출구를 땀 흘리며 찾아 헤맸다. 햇빛은 찬란했고 눈이 부셨다. 숲도 구경하고 동물 친구들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며 그렇게 걸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출구. 그래, 이제 다 잊고 새로 시작하는 거야!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린다! 과거는 모두 묻어두고 이제 잘 살 일만 남았어! 다 잘 될 거야~~~!!!
그런데 역전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한 모습으로. "어머, 너 걸어왔니?" 라고 묻는다. 그 한 마디에 정신이 확 들어서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보통 이런 기분 나쁜 꿈을 꾸거나, 느낌이 싸해서 남편에게 이유 없이 짜증이 날 때가 있다. 평소에는 신경도 안 썼던 남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묘하게 거슬린단 말이쥐. 그러면 정말 높은 확률로 둘이 연락을 했더라.
겨우겨우 제정신을 쓸어 모아서 간신히 하루를 살아남고 그 안에서도 행복하고 싶어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게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전에도 이런 일이 많았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겠지.
내가 이겨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문제 삼는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에 ^^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만 마음이 타들어가는 일. 연인이나 배우자의 친구 문제. "소중한 친구" "절친한 친구" "베스트 프렌드" 그리고 대망의 "특별한 친구" "영원한 친구"
친구고 뭐고 사실 별 문제는 아니었다. 대놓고 우리 친하잖아 했으면 그렇구나 했을 텐데, 내가 화가 났던 건 나 모르게! 내 뒤에서! 둘이서만 쑥덕대다가 내가 문제를 삼으니 이상한 사람 만드는 상황이 문제였던 거지. 그렇게 사람 한 명 정신병자 만들기가 쉽다. ^__________^
너에게 작별인사 하기는 특히 더 힘든 것 같아. ㅇㅇ아, 난 네가 나의 영원한 친구라고 믿어, 그렇지? (ㅇㅇ: 맞아!) 나도 너의 영원한 친구야!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자.
내가 사는 곳에 네가 오면 내가 언제든 너에게 점심이나 저녁 (아침은 안되고) 을 사주고 싶어. 네가 사는 곳에 내가 가도 너는 무조건 나를 만나 꼭 밥을 사줘야만 해!
아니면, 한국으로 네가 이직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ㅋㅋㅋ
오늘 너에게 주는 음악 선물이야 : We Are Young ft. Janelle Monáe
그리고 그 노래 가사
Tonight
We are young
So let's set the world on fire
We can burn brighter than the sun
Carry me home tonight (na na na na na na)
Just carry me home tonight (na na na na na na)
아...... 그렇구나. 불태우고 싶으신 건가? 뭔가 불타오르는 그런 사이? 그런 "친구" 사이?
나의 소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간장종지의 마음을 가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
남편과 선생님의 언행에 대한 충격으로 나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남편이 나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고 설명해도 (이 전화통화도 내가 시켜서 했다) 남편의 상태만 걱정하시고, 끼니를 챙겨 먹고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해주셨던 분.
그래, 내가 이 대답이 황당했던 이유는 정신과 치료받는다는 나에게 자신의 행동이 주었을 충격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이나, 병원을 다닌다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걱정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다. 결국 내가 잘못된 기대를 한 것이다. 그 이외의 논쟁은 의미가 없었다.
와이프가 한국인인데, 한국을 가더라도 아내와 상의해서 갈 일이지 왜 선생님을 따라오라고 하냐는 질문에도, 다 나를 위해서 한 말이라고 하셨다. 나.를. 위.해.서. ... 남편과 내가 결혼하면서 합의하에 한 최선의 결정이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오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2년을 애써 준비한 일을 번복하라고 참 쉽게 말씀하시는구나.
"다 너를 위해서 한 일이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남편과 같은 생각을 하시고 같은 말로 나를 설득하시는구나.
그렇게 나는 자충수를 두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내가 바랐던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대화 속에서 나는 인생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고, 나를 위한다는 말씀도 진심이었으리라 믿는다. 다만 내 마음에 콕 박힌 대화가 이런 거라 문제인 것)
그리고 나는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런 일로 폐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하고, 저희 남편과 친하게 지내주셔서 감사해요. 저 때문에 관계가 변하는 일 없이 앞으로도 좋은 친구가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남편과 선생님이 정신적 외도가 아니라 남편이 호구 물렸다가 뱉어진 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다르게 이야기하셨지만 당시에 내가 느끼기에 그랬음)
내가 선생님께 배운 인생은 이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것.
내가 초대하지도 않은 선생님이 우리 부부의 혼인 서약식에 나타나셨다 해도
1. 그때 선생님께 정중하게 떠나길 부탁하거나,
2. 그때 참고, 주례 선생님과 나, 남편,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혼인 서약식을 이미 했으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당시에는 한마디도 못하고 이제 와서 왜 왔는지 원망해봤지 아무 소용이 없다. 게다가 과거의 나는 내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이 한국 혼인신고서에 증인으로 선생님의 사인까지 받아와도 한마디도 못했다.
내가 남편과 선생님의 친구관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면
1. 그때그때 불편한 점을 당사자들과 대화로 풀거나,
2. 남편과의 관계를 재고해봤어야 한다.
남편에게 선생님과 연락하지 말라고 행동을 통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고, 남편과 선생님의 연락이나 만남을 사사건건 캐물으며 왜 그랬냐 무슨 의도로 그랬냐 따져 물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것이 진정한 어른의 자세였다. 굳이 나와 불편한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시간을 할애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선생님은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과도 위로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자신의 불쾌함을 당당히 표현하셨고, 나라는 인간에 대한 위로를 건네셨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상황을 겪으면서 깨달은 점은 결국 내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진리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혼이면 이혼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결혼이면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다만, 남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이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저런 상황이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마음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 때문에 억지로 바뀌는 관계는 의미가 없었다. 둘이서 서로 불렀던 "베스트 프렌드" "특별한 친구" "영원한 친구" "소중한 친구" "절친한 친구" 라는 게 단어 그대로 진심이었다면 내가 개입한다고 해서 그 관계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의심 가는 상황이 사실이라면, 정신적 외도를 한 남편과 결혼생활을 유지할 가치가 있는지 고민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나의 분노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나는 남편이 나에게 그 둘의 "특별한 친구" 사이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아내인 나보다 "특별한 친구"를 오피스 와이프처럼 대하는 것이 화가 났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정확하게 몰랐을 때에는 남편에게, 그리고 예의상 그 특별대우를 받고 계셨던 선생님에게 근거가 미묘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었다. 엄청난 악수.
남편이 친구가 있는 게 싫은 건 아니다. 그럼 남편이 왕따였으면 오히려 더 힘들 것이다. 남편이 남자인 친구만 있다고 해도 바람피울 사람이었으면 필 것이다. 남편의 친구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 남편이 여사친이 아니라 매번 처음 만난 사람과 일하고 밥 먹고 카톡 하고 대화하는 것이 더 낫지는 않으니까.
나는 남편이 무슨 말을 하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남들이 뭐라고 위로를 건네주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찾아 들었다. 책에서 아무리 교훈을 주고 눈앞에 펼쳐줘도 내가 읽고 싶은 부분만 읽혔다.
바람이라 믿으면 바람이 되어 의심만 하고, 친구라 믿으면 친구가 된다. 다만 모든 것은 변하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은 친구라 했지만 바람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은 맞지만 그때는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봐야 한다. 나를 피해자로 두고 상대를 가해자로만 보기보다,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뛰어넘어 상대를 보고 상황을 봐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더 좋은 쪽으로 몰랐던 일들이 있을 수도 있고, 더 나쁜 쪽으로 몰랐던 일들이 있을 수도 있다. 언제나 항상.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통제할 수는 없다. 인터넷에 사연을 올려 불특정 다수에게 판결 내려달라고 해도, 남편의 행동이 사회적 통념이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온갖 근거를 들어 설명해줘도, 남편이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라고 하면 끝이다. 남편과 여사친의 행동을 매 순간 간섭하거나 감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렇게 해봤자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뭐든 해낸다.
나는 나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남편에 의해 나의 존재 가치가 정해지지 않는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다. 남편이 더러운 옷을 입으면 남편의 선택이고, 남편이 밥을 굶어도 남편의 선택이다. 내가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나의 선택이다.
나는 이혼을 할 수도 있다. 별거를 할 수도 있다. 절대 못한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사실은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남편이 잠재적으로 바람을 피울 수도 있다. 안 필 수도 있다. 절대로 안된다고 믿었던 일들도 일어날 수도 있다고 인지한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던 안 피던 아름다운 내 인생은 계속된다.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가 정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도 있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도 있다. 나의 가치는 내가 정한다.
내 인생에서 바라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이나 세계를 누비는 여행가,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하는 도시인, 행복한 30대를 보내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나의 하루를 채우고, 내가 재밌어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하루 종일 남편이 여사친을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집착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린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남편과 여사친을 의심하기 위함이라니, 얼마나 부질없는 존재인가. 내가 이 소중한 하루를 정말 그렇게 소비하고 싶을까?
지금 바로 실천해야 한다. 내가 지금 밖으로 나가면 하늘을 볼 수 있고, 두 다리로 걸어갈 수 있고, 길에 핀 꽃을 발견할 수도 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할 수도 있는데! 나에게 작은 행복을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오늘도 나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남편에게 내 행복을 담보로 잡혀두지 말고, 나 스스로를 직접 채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의 한 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