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콩을 피하고 싶었어
어느 폭풍우가 치는 밤, 비바람에 엉망진창인 공주가 성에 찾아와 자신은 이웃나라 공주이며 비를 피할 수 있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왕비는 공주가 진짜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침대 위에 콩 한 알을 올려놓고, 그 위에 20개의 매트리스와 20개의 담요를 깔아주었다. 다음 날 아침 공주는 침대가 불편해서 한숨도 못 자 피곤하다고 말하자, 왕자는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공주라 판단하여 아내로 맞아들였다. 콩은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이렇게 완두콩 공주는 예민 보스에 연약과 민감의 아이콘으로 널리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완두콩 공주야 말로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현대 여성의 워너비가 아닐까?
비에 쫄딱 젖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살 길을 스스로 찾아 일반 가정집도 아닌 성문을 두드리는 용기!
초라한 모습이었을 텐데도 자신을 공주라고 당당히 소개하고 타국의 왕족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대담함!
심지어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불편했다고 말하는 솔직함까지?
나같이 소심한 경우라면 일단 아무 도움도 없이 혼자 외출을 감행하지는 못할 것이며 특히 비 오면 밖에 나가지도 않는다 ㅠㅠ
그리고 부탁하는 입장에서 거절당할까 봐 왕실의 침실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ㅠㅠ 마구간(?)이라도 어디라도 좋다며 기준을 낮추지 않았을까?
게다가 20개의 매트리스와 20개의 담요를 줬는데 그 성의를 무시하고 불편해서 못 잤다고 돌직구를 날릴 수 있었을까?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우리나라 속담 교육을 받은 나로서 과연 그 컴플레인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덕분에 잘 잤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입에 발린 인사치레를 하고 재빨리 성을 나와 바로 손절해버리지 않았을까ㅠㅠ
"아니요 아니요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 침대 괜찮았어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은근히 온몸에 멍이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돌려 까기를 하지 않았을까
"이 침대 말고 다른 자리는 없을까요? 제가 높은 곳을 무서워해서요 ^^;"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컴플레인일 듯하다.
뭐... 실화도 아니고 작가의 삶이 투영되어 동경하던 상류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양가감정을 나타내는 이야기니까.
나는 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나에게 정직하지 못하면서까지, 갈등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를 상황을 회피하는가ㅜㅜ 그런 면에서 공주의 당당함은 내가 배우고 싶은 면이다.
https://brunch.co.kr/@kim0064789/75
완두콩 공주가 떠오른 건 에어비앤비에서 지내면서 일련의 사건들을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에어비앤비는 대부분 큰 주택에 사는 호스트가 남는 방을 게스트에게 빌려주는 형식이었다. 수익형 숙박업이 아니라, 실제 살고 있는 주거 공간을 손님에게 열어주며 맞이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나에게는 더더욱 크게 다가왔달까.
호스트는 집주인이고, 나는 얹혀사는 경우라고 생각됐나 보다. 에어비앤비라도 내 집처럼 방 안은 항상 단정하게 청소해 두고, 캐리어를 옮길 때에도 항상 밑에 비닐을 깔고 옮겼다. 사이트에 적힌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사소한 불편함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사소한 불편함을 해결하지 못하고 쌓이고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예약 기간이 다 안 차더라도 취소하고 다른 에어비앤비로 옮겨버렸다. 환불받을 수 있는 건 받고 못 받으면 말고. 나는 그랬다.
반면 남편은 불편한 대화를 꺼리지 않는다. 자잘한 부분이라도 호스트에게 어떤 방식을 선호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편하게 알려달라고 질문하고, 본인에게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편하게 물어본다. 그러면 대부분 호스트 역시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설거지를 할 때 어떤 수세미를 쓰는지부터, 독립기념일에 어느 곳이 좋은지까지. 상대로 하여금 쉬운 내용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고 우리가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도 상대의 요청을 수행하고 호스트의 집을 소중히 다루며, 약간씩 신뢰를 쌓아가는 느낌이었달까.
그래서 한 에어비앤비에서는 예약 기간 만료 며칠 전 예약을 연장했다가 바로 다음 날 취소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액 환불까지 받을 수 있었다. 사택으로 이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결정이 나기 전에 다른 게스트 예약 문의를 받고 우리에게 연장할 예정인지 먼저 물어봐 주신 것이다. 내가 새로 예약을 했으면 하루 전이라 100% 환불이었는데, 기존 예약을 연장한 경우라 환불이 불가했던 것 ㅠㅠ
남편이 호스트와 대화로 잘 해결한 덕분에 에어비앤비 고객센터와 연락해서 환불받을 수 있었다. 나 같으면 껄끄러울까 봐 환불 얘기를 우물쭈물 제대로 못했을 텐데 ㅠㅠ 와 그래서 얼마를 아낄 수 있었는지 정말 다행이었달까. 생활력 최고! ㅠㅠ
여기까지 만이었으면 그냥 럭키비키다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내가 피하기만 했던 완두콩이 나에게 각인됐던 이유는 나도 완두콩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기 때문이다!
내가 체크아웃을 서둘러서 하게 됐던 두 번째 에어비앤비. 진짜 할많하않인데, 우리가 체크아웃을 하고 나서도 자꾸 리뷰를 남겨달라며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에어비앤비 메시지로 네 번, 내 개인 전화번호 문자로 한 번. 히트는 한 달이나 지나서 진짜 뜬금없이 왜 리뷰를 안 써주는지 모르겠다며, 네가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예약 취소했을 때에도 환불해주지 않았냐고 시비 거는 메시지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리뷰 써달라는 그 다섯 번의 메시지를 다 무시하고 있었다 ㅠㅠ 불편하니까. 나는 원래 아무 데도 리뷰를 안 쓰는 편이고, 이 에어비앤비는 좋은 리뷰를 달 수가 없는데 나쁜 말 쓰기는 죄송스러우니까. 그런데 왜 자꾸 리뷰 써달라고 하지? 리뷰 쓸 수 있는 기간도 훨씬 지난 마당에? 게다가 이렇게 시비 걸면 내가 리뷰를 좋게 써줄 줄 아셨나?ㅠㅠ
그래서 며칠을 머릿속에 어떻게 답장할까 무시할까 신고할까 고민했다. 리뷰를 쓰건 말건 소비자의 권리 아니냐, 내가 리뷰를 쓰는 건 나의 선택이다, 왜 나에게 리뷰를 강요하느냐, 이런 식으로 괴롭히지 말라, 등등의 감정적이고도 개인적인 메시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러다가 그냥 고객센터에 신고해 버릴까 하다가 괜히 남의 사업에 악영향을 끼칠까 봐 못했고, 답장을 안 쓰자니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 억울했다.
그래서 일단 상대의 메시지를 인정하고 시작했다. "당신이 리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알겠다."
다음에 아주 객관적인 사실만 전달했다. "에어비앤비에서 리뷰는 사용자의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리고 상대가 원하는 상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렸다. "리뷰 작성 기간이 끝나 리뷰를 쓸 수 없다."
그러고 나서 내 진심을 전달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상황을 솔직하게 공개했고, 예약 변경할 때에도 사정을 모두 설명했다."
상대가 가장 불만일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환불은 호스트가 직접 환불 가능하다고 설정한 부분만 환불받은 것이고, 환불해 주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 환불 규정을 호스트가 설정에서 바꿀 수 있다."
내가 가장 불만일 부분에 대해서는 해결책만 제시했다. "당신의 사업을 존중한다. 그러니 (나한테 연락하지 말고) 앞으로의 분쟁은 고객센터를 통해서 해결하자."
나는 내가 적은 답장에 대해 상당히 만족했는데, 호스트는 읽씹이다. 뭐 더 이상 연락 없으니 됐고, 나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는 걸 보여줬으니 됐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는 건, 어쩌면 나를 기만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상황이 분명하다면 나의 바람을 무시하게 되니까. 당당하게 할 말은 하되, 예의 바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자.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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