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조절 self-regulation과 공동조절 co-regulation
남편이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적의 일이다. 무슨 일이었는지도 모르고 왜 그랬는지도 기억도 안 나지만, 산책 중에 남편이 자기가 엄청 화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성큼성큼 혼자서 저만치 가버렸었다. 쳇, 그놈의 성질머리 하고는.
아마 남편이 예전에 살았던 지역이기에 자기 세력권(?) 이라 우세라 느꼈는지
당시에는 남편 혼자 일하며 수입이 있었던 상황이기에 권력 싸움에서 갑이라 생각했는지
큰 시험 본 지 얼마 안 돼서 모든 사람의 주목과 축하를 받아 기세등등 했는지...
뭐 나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의 사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남편의 짜증에 내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나중에 남편이 화가 풀리면 놀려주려고 사진까지 남겨놨다. 이런 여유를 부리다니.
생전 처음 오는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란 보통은 더럽기 짝이 없었는데. 아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남편 하나밖에 없는 곳으로 이민을 와서,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혼자 버려졌다는 감정에 휩싸여 얼마나 서러워 했었는데. 어떻게 아무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읽었던 자기조절 self-regulation과 공동조절 co-regulation에 관한 내용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성. 자조능력. 자기 주도.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든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행동한다.
관계성 안에서 나를 잃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남편이 화를 낸다면, 나는 똑같이 화를 내고 싶은가?
남편이 앞서 걸어갔다면, 나는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싶은가?
남편이 무례한 행동을 했다면, 내가 스스로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 그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고 싶은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남편이 화를 낸다고 해서 내 기분까지 망쳐가며 그 화를 고스란히 받아낼 필요는 없다.
남편이 먼저 떠났으면 남편에게 필요한 시간을 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남편이 설사 나에게 상처를 주려 했다 하더라도, 내가 영향을 받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한테 짜증 내는 상황이라면, 그 감정을 인정해 주되 감정의 원인에 대해 정확히 짚어내는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방어를 하는 것이다. 아마 본인도 넘쳐흐르는 부정적인 감정에 어쩔 줄 몰라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우아하고도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면 상대 역시 꼬리를 내린다.
우리 남편의 특기: 말로 사람을 죽이기.
비꼬는 실력이 아주 상당하다. 다만, 그 가시 돋친 말을 하는 태도는 굉장히 이성적이기에 본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며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 하지만 행간에 숨은 의도를 아는 내가 발끈해서 화를 낸다면 격하게 반응하는 내가 천하의 나쁜 년이 된다는 거.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본인은 대화하기 싫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진짜 사람 미치게.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다툼이든 가계 경제에 대한 내용으로 흘러갔다. 그동안 내가 외벌이일 때 본인을 무능력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고 나를 원망하려는 의도가 가득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남편의 말에 내가 발끈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그동안 고생한 나의 희생은?!
수동공격적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란, 순수함이 아닐까. 남편이 한 말, 그 이성적인 텍스트 그대로 듣기. 말투에는 공격성이 없으니까. 그 외의 모든 비언어적 요소는 무시한다. 어이가 없다며 비웃는 저 웃음소리, 큰 눈에 더 크게 굴러가는 눈동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상처받았다는 티를 내는 제스처에 영향받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발작버튼이라는 걸 남편이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본인이 의도했다고 주장하는 메시지만 되풀이하며 ~~라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라 전달한다.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의미로, 나에게 가장 긍정적일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라 분명히 전달한다.
(최악 중의 최악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어쩌면 남편이 실제 의도했었을 수도 있는) ~~라는 의미로 해석될 오해의 여지가 있을 것 같으니 본인이 인정한 의미만을 표현할 수 있게 다시 바꿔서 말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도 경제적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의미인 거죠?”
“당신이 곧 직장을 찾을 거라는 의도로 말하는 거죠?”
“당신도 가장의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뜻이죠?”
“그러면 당신도 경제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다시 말해줄 수 있나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당신이 구직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해줄 수 있나요?”
“가장의 역할을 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해줄 수 있나요?”
어쩌면 본인이 가장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이게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본인이 한 말이니까. 감정 상해 내가 상처받았다 네가 상처 줬다 내가 언제 그랬냐 네가 그랬다 끝도 없이 따져대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각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짚어주고 상대의 입으로 다시 듣는 게 나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더욱 수동공격적으로 나올 것이다. 어쩔 때는 드라마 보면서 주인공 얘기 하고 있는데도 자격지심에 발끈하기도 했고, 탈락 메시지를 받았을 때에는 말도 안 꺼내고 눈치 보며 있었다. 우리가 다툴 때마다 항상 레퍼토리로 나왔던 남편의 말.
그러니까 그게 전부 내 잘못이란 거 아냐?
너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고 다 나만 고치란 말이지?
다 내가 무능력한 탓이고 네 인생 망쳤다는 거잖아?
이렇게 나오면 대화는 절대 진전이 안 된다. 그렇기에 대화의 목적을 정확히 설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인 주제로만 노선을 정해 방침을 고수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어디서 지낼지 의논하자는 거예요.”
“우리 상황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듣고 싶은 거예요.”
“나는 에어비앤비에서 계속 살기보다 우리가 월세집을 계약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몇 월 며칠까지 결정되는 게 없으면 계약하러 가요.”
어느 정도 대화가 잘 됐다고 느껴진다면, 가장 중요한 마무리는 감사의 표현이다. 이 대화가 잘 끝났으며, 앞으로도 이렇게 대화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달해야 한다. 그래, 어쩌면 아주 당연할 평범한 대화일 수도 있겠지만, 감정 상해도 서로 진정하고 대화를 끝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지 뭐.
그리고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관계를 상기시킨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한쪽의 희생이 아닌 양 쪽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물론 나도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내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리려면 상대의 상처를 알아주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내가 그동안 노력해 온 부분을 인정받고 싶으면 상대의 노력부터 인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내가 한 희생에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상대 역시 타협한 부분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이 날은 평화롭게 이성적으로 지나갔다. 남편은 화를 표현한 것에, 낯선 곳에 나를 두고 먼저 간 것에 사과했고 나도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나를 먼저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화가 났을 때에는 남편이 나를 진정시켜 주는 것처럼, 남편이 화가 났을 때에는 내가 차분한 쪽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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