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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부인과 92 병동

by 뚜벅뚜벅

항암 때문에 부인과에 정기적으로 입원하다 보니 병원 공기와 풍경이 익숙해진다. “오늘은 어떤 환자들이 입원했나 “ 병동 복도를 걸으며 다른 방 입원환자 모니터창을 보기도 하고, 오가는 환자들의 나이와 중증 정도를 스캔하며 혼자 짐작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다 항암두건을 쓴 환자를 만나면 반갑게 눈인사를 건네고 싶은 생각마저 드니 오지랖도 넓어지는 것 같다.


오늘 내 방은 몇 호지? 항암 하는 날,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며 익숙하게 짐을 푼다. 간호사분들은 등록을 위해 바쁘게 오가고, 주의사항을 전달하며 수액을 준비하신다. 이제 처치도구가 잔뜩 들어있는 서랍장(?)의 바퀴소리만 들어도 간호샘들이 어떤 처치를 하러 오시는구나 짐작이 될 정도다.


주사를 맞는 동안에는 부작용이 적은 편이라 낮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을지 계획을 한다. 늘어지지 않게 음악 들으며 책도 좀 보고, 그러다 졸리면 잠에 들어도 좋겠다. 브런치 글도 다듬고 영화나 드리마 놓친 것도 보자 싶지만 막상 병실에 들어오면 의욕이 떨어진다. 잠이 오면 좋으련만 케모포트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독한 약을 느낄 때면, 한없이 약병을 바라보기도 한다.


페이스북에서는 8년 전, 5년 전 사진이 올라오며 건강한 민간인일 때의 일상을 띄워주는데 지금 나의 상황과 동떨어져서 이질감도 느껴진다. 때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진을 만지며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우울감에 빠질까 두려워 복도에 나서보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환자들과 마주치는 일이 적다. 다들 OTT를 보는지 도통 나오질 않는 건지… 병동은 드라마처럼 시끄럽거니 응급상황이 많지 않고, 간호사들의 분주함만 느껴질 뿐 적막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같은 방 환자의 이야기가 더 잘 들리는 걸까?

입원 내내 보호자 침대에서 숙식하며 아내 이야기를 친절히 들어주던 남편.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커튼 너머로 살펴보기도 하고, 젊은 아이 엄마가 입원했을 때는 수술 직후 간병인을 고용했는데 너무 다정한 분이라 번호를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어제 옆자리 젊은 환자는 진통제 쇼크를 겪고 무사히 퇴원하는 걸 감사하는 부부였는데 조용히 응원을 보내게 됐다.


하루 2번 회진을 도는 담당 교수님의 방문도 반갑다.

질문할 내용을 미리 생각해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지 않는 날도 있지만 바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 서운함이 들어 뭐라도 묻기 위해 머리를 굴려본다. 어느새 나 혼자 정이 들어버린 교수님. 교수님의 얼굴색을 살피고 무탈하시길 바라는 마음도 커져만 간다. “괜찮으세요? “라는 인사말에 뭔가 불편하다고 하면 “힘들어서 어떡하죠?” 다시 묻고 “00 해드릴까요?” 이런 말투마저 흉내 낼 정도로 반갑고 고마운 존재다.

가장 신기한 것은 부정적이고 불안한 생각이 들 때쯤 우연 같은 에피소드가 생긴다는 것이다. 잘 먹어야 한다며 손수 간식을 챙겨 온 지인. 치료 잘 받아 대견하다며 격려해 주시는 부모님과 지인들의 전화가 잊을만하면 나를 일으켜준다. 최근엔 추가로 유전자 돌연변이 검사를 했는데 좋은 결과(5% 환자만 해당되는 유형에 들어가게 돼 교수님이 더 신기해하심)가 나와 남은 치료 과정에 용기를 얻게 됐다.


무엇보다 즐거운 때는 퇴원가방을 챙기며 팔에 두른 환자용 팔찌를 끊을 때다. 놀이동산이나 휴양지 입장권 팔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환자코드가 담긴 이 밴드를 벗어던질 때 쾌감이란.. 오늘도 그 홀가분함을 느끼며 병동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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