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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Jan 23. 2021

이건 결혼을 피할 마지막 기회다

어쩌다 결혼 

내 인생에서 결혼할 때만큼 결단력과 실천력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이 남자를 구제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착각에 빠져 빠르게 결혼을 결심하고 추진했다. 나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남자에게 달려가 엉덩이를 걷어차며 "빨리 일어나! 우린 결혼해야 한다고!" 하며 재촉했다. 그때는 몰랐다. 결혼 준비는 전쟁의 서막이며 결혼 생활은 전쟁이라는 걸. 


결혼 준비는 '결정'이 전부다. 결혼 날짜, 예식장, 신혼여행지, 신혼집을 정하는 일부터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청첩장, 답례품을 정하는 일까지. 하나하나 알아보고 따져보고 결정하느라 몸이 너덜너덜해졌고, 웬만해선 한 번에 OK 사인이 떨어지지 않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남편: 원하는 대로 해. 

나: (오랜 고민 끝에) A가 제일 마음에 들어.

남편: 좋아. 

(며칠 뒤)

남편: 생각해보니까 A는 ~ 때문에 안 되겠어. 

나: 마음대로 하랬잖아?

남편: A는 안 돼. 다른 거 골라봐.

나: 그냥 오빠 마음대로 해.

남편: B로 하자.

나: 그래. 


그렇게 결혼 날짜도 예식장도 신혼집도 모두 남편이 원하는 대로 했다. 남편이 B로 하자고 했을 때 나는 흔쾌히가 아니라 마지못해, 더는 말도 섞기 싫어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래"라고 대답했다. 마음속에 서운함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그만두자고 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때 도망쳤어야 했다. 이혼보다 파혼이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신혼여행지는 정말 어이없게 정했다. 평생 제주도에 한 번도 못 가본 나는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가는 게 로망이라고 했고, 평생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가본 남편은 아무리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제주도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제주도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이건 남편 말을 따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대폰을 보다가 J 항공에서 초특가 프로모션 이벤트를 하는 데 사람들이 너무 몰려 홈페이지에 접속이 안 된다는 기사를 봤다.


"홈페이지 접속이 안된대. 한 번 들어가 볼까?"

"진짜 안 들어가진다."

"난 되는데?"

"응? 된다고?"

"사이판, 괌, 보라카이... 어디 갈래?"

"이거 지금 안된다 그랬는데..."

"결제까지 다 되는지 한번 해보자."

"괌으로 해볼까?"


결제가 됐다. 괌까지 성인 2명 왕복 항공권을 50만 원에 예매했다. 확실히 초특가인 것 같았다. 신혼여행지로 크로아티아와 하와이를 놓고 고민하던 중에 괌은 너무 뜬금없었지만, 초특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신혼여행은 괌으로 가기로 했다. 사람들이 신혼여행 어디로 가냐고 물을 때마다 크로아티아나 하와이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괌으로 간다고 하니 "혹시... 임신?" 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술을 자주 마셨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결혼식 전날이 됐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조퇴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웨딩 네일만 받으면 준비 끝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날려 잠시 누웠는데 갑자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열도 났다. 분명 집에 올 때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남편을 불렀다.


"나 몸이 너무 아파. 못 움직이겠어. 이건 분명 결혼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 것 같아. 결혼을 피할 마지막 기회를 주신 거야. 나 결혼 못하겠어."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덜 아팠네. 네일 받으러 가자."


네일숍 앞에 도착했는데 도저히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정신마저 아득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네일숍 앞에서 예약 취소 전화를 하고 병원으로 갔다. 체온을 재보니 39도였다. 남편을 한 번 째려봤다. 


"뭐? 내가 덜 아팠다고?"

"아니... 그러게 왜 헛소리를 해..."

"이건 진짜 결혼을 피할 마지막 기회...."

"조용히 해."


의사 선생님께 내일이 결혼식이니까 어떻게든 열 좀 빨리 내리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내일 결혼할 신부답지 않게 초췌한 몰골로 그런 소리를 하려니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수액을 맞고 열이 내렸고 다음 날 무사히 결혼식을 했다. 나는 신이 주신 마지막 기회마저 그렇게 놓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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