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철이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어두웠다. 그리고 서늘하고 추웠다.
아주 오래된 낮은 건물들이 촘촘히 붙어있었다.
그 촘촘함이 마음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닥은 울퉁불퉁 엉망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어두운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중간에 있는 가로등이 아주 옅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덩그러니 있다는 것은 수철이를 힘들게 만들었다.
구석에 앉아있는 수철이가 혼란스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네..."
수철이 있는 곳은 작은 길들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는 골목이었다.
그곳은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수철이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동네의 골목이었으니까.
그 당시 골목대장이었던 수철이 이곳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골목은 수철이 가장 잘 아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골목을 수철은 계속해서 헤매고 있었다.
가장 익숙한 장소가 탈출하지 못하는 미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무리 길을 찾아다녀도 같은 곳만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이곳을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이틀? 일주일? 일 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항상 어두운 곳이었으니 낮과 밤이 없었다.
시간 개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개념 없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철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답답함에 미쳐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거기 누구 없어요? 나 좀 내보내 줘요!!! 아니 살려주세요!!!"
"..."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거라곤 수철이 외친 소리의 메아리뿐이었다.
"젠장... 나 이대로 죽나?"
수철이 또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아 씨발!!! 누가 있으면 제발 대답 좀 해보라고!!!"
수철이 허공에 소리치는 그 순간 누군가 골목사이를 휙 하고 지나갔다.
여기에 오고 나서 처음 느끼는 인기척이었다.
자신 말고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귀신인가?"
기쁨과 공포의 감정이 수철이를 감싸고돌았다.
그러기도 잠시 자리에서 벅 차고 일어나며 수철이 말했다.
"저기요! 누구세요? 우리 잠깐 얘기 좀 합시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미동 없이 수철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철도 미동도 없는 남자의 모습에 주춤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다.
당장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수철은 남자가 사라진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 조심히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던 그 순간.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남자는 수철이를 피해 휙 하고 달아났다.
수철이 놀라 자빠질 뻔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고 그 남자가 사라진 곳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봐요 얘기 좀 합시다. 아니 얼굴이라도 좀 보여주면 안 돼요?
역시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수철을 피해 다녔다.
수철이 다가가면 남자는 물러났다.
무슨 같은 극의 자석처럼 둘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마치 수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남자의 행동에 미처버릴 노릇이었다.
수철의 언성도 약간 높아졌다. 수철이 따지듯 남자에게 말했다.
"이봐요? 지금 장난해? 나랑 숨바꼭질하자는 거야 머야? 짜증 나네 진짜..."
하지만 그런 수철의 말에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수철의 마음속에는 천불 났다.
벽이랑 대화하는 기분이 이런 기분인가?
뭔 말이라도 해야 포기하든지 말지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남자는 요리조리 수철이를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럴수록 수철은 오기가 생겼다.
"내가 저 개새끼 잡는다! 뒤졌어!"
수철은 다짐했다. 저 남자를 꼭 잡겠다고 말이다.
기필코 저놈의 멱살을 잡고야 말겠다.
그래서 이곳이 어딘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꼭 물어보겠노라고 굳은 결심을 했다.
수철은 운동화 끈을 꽉 묶었다. 그리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수철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수철이 느끼기에는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 같았다.
몸은 다 푼 수철이 남자를 향해 순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는 재빨리 수철을 피해 달아났다.
그렇게 수철과 남자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수철이 달리면 남자도 달렸다. 수철이 멈추면 남자도 멈췄다.
다시 수철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럼 남자는 또 천천히 물러났다.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수철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남자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으아악! 씨발!!! 제발 좀 잡혀라 어? 아니 쫌 잡혀주라!"
수철은 생각에 잠겼다.
무작정 그를 따라만 다녀서는 잡을 수 없다.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저 미친 인간을 아니 저 썩을 인간을 잡아야 한다.
수철의 첫 번째 작전은 잠복이었다.
어두운 골목 구석에 숨어 남자를 기다렸다.
보이는 것이라곤 수철 빛나는 눈동자뿐이었다.
눈동자가 너무 밝았던 걸까? 남자는 저 멀리서 수철을 발견하고 다가오지 않았다.
남자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던 수철이 순간 소리를 확 질렀다.
"으악!!!! 너 내가 기필코 잡는다."
두 번째 작전은 설득이었다.
간절히 진심을 전하면 남자도 들어주지 않을까?
아니 한마디라도 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수철은 남자와 천천히 대화를 시도했다.
남자와 거리를 둔 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수철이 말했다.
"저기... 우리말로 합시다. 여기서 나가면 내가 술 한잔 살게요... 당신도 여기서 헤매는 거 같은데 같이 힘을 모아서 나가 봅시다."
"..."
"나랑 그냥 말이 하기 싫은 거예요?"
"..."
"아니면 말은 못 하시나?"
"..."
남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실패였다.
"아 씨발! 아 쫌 제발 얼굴이라도 봅시다! 예?"
남자는 말없이 수철을 피해 달아났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무식한 방법의 체력전.
남자가 지칠 때까지 미친 듯이 뛰는 단순한 방법이었다.
"그냥 여기서 늙어 죽나 뛰다가 죽나...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자."
수철이 남자가 있는 쪽을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래 봬도 특전사 707 출신입니다. 체력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그쪽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봅시다. 각오하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수철은 남자를 쫓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남자를 쫒았다.
얼마나 뛰었을까?
수철은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온몸은 땀으로 젖고 있었다.
그 젖은 땀의 무게가 수철이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땀 한 방울이 옷을 적실 때마다 발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처음엔 단순한 오기였다. 남자를 잡아보겠다는 오기.
그렇지만 남자도 점점 지쳐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수철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참고 극복하면 남자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격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5미터... 3미터... 1미터...
마침내 수철은 그 남자의 뒷덜미를 잡았다.
"드디어 잡았다 이 개자식!"
수철의 노력이 남자를 잡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그놈을 잡았다는 게 수철은 그저 기뻤다.
숨이 가빴지만 꾹 참고 남자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수철은 너무 놀랐다.
보여서는 안 될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아니 그냥 수철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자기가 잡은 남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말이다.
그리고 수철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과연 자기 자신을 잡았는데 기절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잠시 후 정신을 잃었던 수철이 눈을 떴다.
오랜만에 보는 빛에 수철은 눈을 찌푸렸다.
눈의 초점이 맞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수철의 시야에는 하얀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천장과 자신의 시야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고 명찰에는 교수라고 쓰여 있었다.
수철은 그가 의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천천히 수철을 살펴보던 의사가 말했다.
"김수철 씨 정신이 쫌 드세요? 기적입니다! 당신은 3년 만에 기적적으로 뇌사상태에서 깨어나셨어요!"
그렇게 수철은 자신을 잡고 기나긴 수면에서 깨어났다
어린 시절 익숙한 골목에서 자기 자신과의 숨바꼭질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