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와 정호가 활짝 웃고 있는 결혼식 사진 앞.
그 앞으로 보이는 둘의 결혼반지.
비어 있는 둘의 손가락.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있는 정호.
며칠 동안 씻지 못한 듯 꾀죄죄한 정호의 몰골이 둘의 좋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윤희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런 정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거울을 보며 한참을 서 있는 정호에게 윤희가 먼저 말했다.
"오빠? 뭐 해? 나가는 거 아니었어?"
윤희의 말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정호.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서있는 정호.
그런 정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은 한번 꾹 깨물고 입을 열었다.
"그래, 가자..."
그 말과 동시에 정호는 미리 준비한 듯한 큰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윤희는 그런 정호의 뒤를 따라나섰다.
***
운전을 하던 정호가 혼잣말하듯 입을 열었다.
"3년... 만인가? 바다에 같이 가는 건?"
정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신 앞만 보고 운전을 하는 정호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듯한 표정을 간신히 참고 있는 정호였다.
그리고 그 옆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희.
윤희는 정호와는 다르게 조금은 들뜬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3년 만이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더 설렌다. 인상 좀 풀어... 그래도 여행인데... 계속 이렇게 우울하게 갈 거야?"
윤희가 정호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정호는 그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윤희의 노력과는 다르게 차 안은 침묵 그 자체였다.
음악소리는커녕 라디오 소리조차 없이 차는 달리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없이 차만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윤희가 다시 한번 용기 내 말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적당히 불고 너무 좋은 날이다. 진짜 날짜 잘 맞춘 거 같아. 그렇지? 오빠도 창문 좀 내리고 바람 좀 쐬봐."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하는 윤희. 윤희는 계속해서 정호에게 말을 걸며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윤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아니면 듣지 않는 걸까? 정호는 시종일관 무표정과 무응답으로 윤희를 대하고 있었다.
그런 정호의 반응에 말이 많던 윤희도 점점 말 수가 줄고 있었다. 둘의 공간에는 그저 침묵과 간혹 정호가 쉬는 한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한숨만 쉬며 가던 정호가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참 좋았다 우리. 그렇지?"
"그럼~ 좋았지. 많이 사랑했어 난."
"난 싫다. 지금 우리의 이 여행이... 솔직히 힘들어..."
"오빠... 그냥 좋은 생각만 했으면 좋겠어 오늘은..."
"..."
또다시 침묵. 정호는 그렇게 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둘의 분위기는 어둠 그 자체였다. 말없이 달리는 정호. 그리고 그런 정호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윤희. 하지만 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창밖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해안도로의 바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따듯해 보이는 모래알. 그렇게 이쁘고 긴 해안도로를 둘은 말없이 달리고 있었다.
음악이라도 흘러나와 주면 좋으련만 차의 창문도 꽉 닫쳐있어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정막 속에 정호와 윤희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무언의 시간은 계속되고 어느덧 둘의 차는 해안도로의 끝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조용한 바닷가. 늦은 오후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파도 소리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만이 둘을 맞이해 주고 있었다.
바닷가 한쪽에 주차를 한 정호. 그리곤 말없이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는 정호였다.
그렇게 몇 시간을 바다만 바라보는 정호.
그런 정호를 바라보는 윤희. 윤희는 그저 말없이 정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정호는 차에서 내렸다. 조수석에서 바라보는 정호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였다.
그리고 그 슬픈 표정에 마음이 좋지 않은지 눈물을 흘리는 윤희였다.
정호는 드렁크로 다가갔다. 그리고 큰 여행용 가방을 꺼내드는 정호.
정호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쫌 걷자...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래. 걷자! 걷는 것도 추억이니까."
그런 정호의 말에 바로 반응하며 대답하는 윤희. 자신의 대답에 정호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기 바라는 윤희였다. 애써 밝은 척하며 정호의 옆을 걷는 윤희였다.
그렇게 둘은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오빠 있잖아.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 둘이 연애할 때는 많이 왔었는데... 결혼하고는 처음 오는 거 같네. 여기 바다가 조용해서 우리 둘만의 비밀 장소였는데..."
정호는 입을 다문채 묵묵히 걷고 있었다.
하지만 윤희는 정호옆에서 계속 조잘대며 걷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윤희는 연신 정호의 기분을 풀어보려 계속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는 윤희. 그리곤 한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오빠 저기 좀 봐... 저기서 우리 첫 키스 했잖아. 기억나? 헤헤. 오빠도 긴장하고 나도 긴장해서 서로 막 고개 같은 쪽으로 돌려서 박치기하고. 막 입에서는 소주 냄새나고, 입에 초장도 묻어있고, 참 모든 게 서툴러서 웃기고 행복했는데... 진짜 둘 다 바보 같았어..."
하지만 어떠한 질문에도 정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땅만 보고 걷는 정호였다.
그저 걸었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리냥 그저 앞을 보고 걸을 뿐이었다.
정호가 걸으면 그 뒤를 윤희가 뒤 따랐다. 정호는 걷고 윤희는 조잘대며 말이다.
그러다 간혹 윤희가 앞서 가도 정호는 자신의 걸음을 묵묵히 옮기고 있었다. 정호는 터벅터벅 윤희는 총총총.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지고 있는 붉은 태양. 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해는 따듯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붉은 해를 보며 윤희가 말했다.
"오빠 저 석양 좀 봐... 너무 이쁘지?"
"..."
"해는 지는 모습도 이쁘네... 우리도 해와 같았으면 좋겠다."
윤희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정호는 걷고 또 걸었다. 바닷가 끝쪽에 있는 바위섬을 향해서 말이다.
그렇게 정호가 마침내 멈췄고 그 앞에는 바위섬이 보였다.
바위섬은 지는 해와는 다르게 어둡고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붉은 해의 빛도 바위섬은 어둠으로 잡아먹고 있었다.
잠시 후 정호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좋겠다. 지는 해도 보이고..."
정호가 바위섬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은 높게 보였던 바위섬을 정호는 조용히 오르고 있었다.
뒤를 따르던 윤희가 말했다.
"오빠 여긴 별로야. 어둡고 칙칙하고... 우리 다른 데로 가자. 응?"
그런 윤희의 말은 무시한 채 정호는 바위섬에 올랐다. 그리고 그 넓고 차가운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툴툴거리던 윤희도 정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정호는 자신이 가져온 여행용 가방에서 소주를 꺼냈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정호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주도 없이 소주 한 병을 자신의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을 다 마신 정호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아주 빨갛게 익은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자신이 없어..."
정호의 말을 들은 윤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빠... 난 오빠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난... 너랑 헤어지는 게 싫어..."
"오빠 난 이러는 오빠가 미워..."
"사랑해 윤희야."
이 한마디를 남기고 정호는 하염없이 소주만 마셔댔다. 그런 정호를 보며 윤희는 펑펑 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해는 지고 달빛이 바다를 비추었다. 차갑지만 밝은 빛으로 달은 정호를 비추고 있었다. 바다는 점점 차오르고 넓었던 바위섬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거세지는 파도가 으르렁대며 금방이라도 바위섬을 삼킬 듯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바위섬에선 더 이상 정호와 윤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위섬엔 고(故) 이윤희라고 쓰여있는 텅 빈 납골함 과 정호가 벗어 놓은 구두, 빈 소주병, 하얀 편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윤희야... 난 너와 같이 있고 싶어... 사랑해...]
어둠 속에서 바닷물은 점점 차오르고 거세지고 있었다.
몇 번의 큰 파도가 지나가고 그렇게 납골함과 구두, 편지는 어둠과 바닷속에 잡아 먹히고 말았다.
그리고 검은 바다에는 하얀 달빛만이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