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도 괜찮아, 어떻게든 어떻게 될 테니까
#3.13 싱가포르 도착
차근차근, 도착한 이야기부터 풀어 보도록 하겠다.
오랜만에 인천 국제공항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힘들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 육체라는 하드웨어도 낡아졌는지, 가는 그 길이 그리 가뿐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설렘의 버프를 받아 어쨌든 잘 도착했고, 도착한 공항은 아직 완벽하진 않았지만 다시금 활기를 찾은 듯해서 어쩐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비행기는 앞서 말했듯이 에어 프레미아.
출국 심사를 마치고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자리가 생각보다 넓어서 맘에 들었다.
신경 쓰였던 건 아직 비행기에서는 마스크를 쓰라고 되어있는데, 이미 마스크 해제가 된 지 오래된 나라에서 여행온 사람들이 모두 재채기를 계속하고 콧물을 마셔대면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
여기에 승무원들도 크게 재지를 하지 않았었고, 때문에 나는 신경이 쓰였지만 이 또한 코로나가 풀려가는 과도기이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 노력해야 했다.
식사는 스파게티와 치킨 덮밥이 나왔는데, 안타깝게도 스파게티가 솔드아웃 되면서 우리는 치킨 덮밥이라는 선택지밖에 가질 수 없었다.
와 근데 진짜 맛이..
니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분식을 미리 먹고 탑승한 상태라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아 대충 먹다 말았고, 곧 나는 '성난 황소'를 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6시간가량의 비행.
한 4시간가량 날아가는 중 갑자기 대동이가 나를 깨웠다.
"큰일 났어!!"
이 무슨 걱정스러운 서두인가.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 팬티를 안 싸왔어."
참고로 대동이는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 순간부터 '오늘 저녁에 지금 입고 있는 팬티를 빨아서 말려 입어야 할지, 아니면 내일까지 버티다가 사서 갈아입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한 '내일 팬티를 사서 빨아서 입어야 하는데, 빨면 바로 입지 못하니 새것인 채로 입어도 될지 안 될지'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벗고 다니면서 자유를 만끽하라고 했지만, 대동이는 그건 안된다고 했다.
"팬티는 내일까지 버티고, 내일 그냥 새 거인 채로 입어."
그래서 적당한 답을 내려줬다.
대동이는 이런 선택을 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뭐가 걱정이고 문제인지, 나에게는 신경 쓸 거리가 아닌데 격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답을 내려주면 "그래도 되겠지?"라고 잘 따르는 것을 보니, 나름 이 제안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어쨌든 비행기 안에서 팬티 사건은 그 이후로 잠잠해졌고, 우리는 곧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SG카드를 인터넷으로 작성해 둔 터라, 입국 심사는 초 스피드로 끝났고 우리는 지하철 통과하듯 싱가포르에 입성하게 되었다.
얼떨떨했다.
마치 그동안 해외여행을 다니지 못했던 것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듯 모든 것이 스무스하고 당연하게 넘어갔다.
"19일 오전 11시에 체크아웃입니다. 청소는 이틀에 하루입니다. 좋은 여행 되세요."
솔직히 호텔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싱가포르 치고는 대단히) 저렴한 가격이었고, 이 전에 방문했던 싱가포르 호텔들도 아주 좋은 곳들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웠어서 '비슷비슷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1차 중격은 방문을 열며 시작되었다.
'캐리어를 펼칠 공간이 없다!'
물론 펼치려면 펼칠 수 있긴 하지만..
그리고 나름 여러 호텔에 숙박해 보았었지만 '생수를 단 1개만 주는 곳'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괜찮다.
욕실에 곰팡이나 이불의 얼룩까지도 괜찮은데,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벽 너머로 여기저기서 나는 기침 소리. 이건 진짜 불안했다.
'너무 빨리 여행 온 건 아닐까? 나 이러다 코로나 걸리는 거 아니야?'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그 기침 소리의 원인은 사실 코로나가 아니었다.
'공기가 아주 아주 후졌다.'
여기 공기 청정기를 틀어두면 당장 붉은 사이렌이 돌아가며 '여기서 숨을 쉬지 마십시오'라고 경고 메시지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나 암담해."
대동이가 잠들기 전 내게 말했다.
"괜찮아, 오빠."
나는 대동이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상황은 안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이 힘든 모든 순간도 결국 지나가 버릴 일이고, 뒤돌아 봤을 때는 그리운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힘든 지금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말자.
"숨이 안 쉬어지는 것 같아. 나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문제는 나의 위로가 대동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첫날부터, 떠나는 마지막 날 까지도...
#3.14
싱가포르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이지링크라는 교통 카드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버스와 지하철 모두 이용할 수 있는데, 싱가포르는 대중교통이 특히 잘 되어 있어 더욱 알차게 사용된다.
우리는 처음 싱가포르를 여행 왔을 때 만들었던 이지링크를 들고 지하철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이게 언제쯤 만들었던 거지?'
내가 알기로는 5년 정도의 유효기간이 유지되기 때문에 '아직은' 가능한 상태인 것이었다.
개찰구에 들어가며 내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니 조금 긴장되었다. 안되면 안 쓰면 되지만, 어쩐지 바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신경 쓰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나의 카드는 살아 있었다.
그것도 무려 4싱이 넘는 금액이 들어있는 채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오예.'
분명 나의 돈인데도 어째서 꽁돈이 생긴 느낌이 들까?
어쩐지 남은 싱가포르의 나날들이 잘 풀릴 것 같았다.
싱가포르에서 첫끼는 부기스 정션으로 정했다. 도시 중심지로 거의 모든 교통편의 허브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와닿을 것이다. 이곳은 커다란 쇼핑몰이 연결되어 있어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현지인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 푸드 코드도 있어서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메뉴들을 선택해서 먹을 수도 있다.
그곳에 도착한 감상은..
시간이 지난 만큼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대로임에 당황스럽달까?
오직 바뀐 것은 우리가 자주 찾던 푸트 코트만 공사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곳만 음식을 파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환전하기 전이라서 우린 비싼 식당에 가서 먹을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지하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가 선택한 가게는 중앙 쪽 위치한 카레집으로 고소한 냄새도 좋았고 무엇보다 매우 저렴해 마음에 들었다.
돈가스와 삶은 양배추가 곁들여진 카레가 6.5싱(약 6,300원)이었던 것이다.
맛있었다. 고소한 카레는 물론이고 넉넉하게 올라간 돈가스도 안성맞춤이었다. 아마 집 근처에 이런 가게가 있었다면 자주 찾았을 것이리라.
자주 가던 푸드코드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견한 가성비 맛집.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인듯하다.
우리가 부기스 정션으로 온 것에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바로.. 대동이의 팬티.
익숙한 게 무섭다고 우리는 아는 브랜드인 유니클로로 향했다. 오는 길에 속옷을 파는 다른 곳들도 있었을 것인데 만만한 게 유니클로였던 것이다.
돈을 아끼자면 호텔 근처의 가게에서 파는 3싱에 파는 팬티를 선택해도 됐었다. 그 팬티는 아직 새것인데도 이미 오래 입어온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우리의 기념할만한 첫 번째 기념품은 유니클로 팬티가 되었다.
가격은 한국과 비슷했고, 디자인도 동일했는데 대동이는 어쩐지 한국에서 파는 유니클로 팬티가 더 질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팬티의 재질을 만져가며 진지하게 고르는 대동이를 보고 있자니 나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고르기나 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 실제로 내뱉어 버린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