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거나 말거나
주말은 근교 마을에 장이 열리는 날이라 한 번씩 나들이도 할 겸 구경삼아 길을 나선다. 오늘은 예전에 살았던 동네 근처 Novalaise라는 곳의 일요 마켓에 구경을 갔는데 10시쯤 도착했더니 이미 온 마을이 주차장으로 변해서 차 세울 곳 찾기가 어려웠다. (주말 마켓을 가려면 9시 이전에 가는 편이 좋다)
마을 한 바퀴를 돌아 겨우 자리를 찾았는데, 아뿔싸.. 하필이면 도로가 주차장에만 빈자리가 있다. 원래도 평행주차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에 오고 나서는 내차가 아니라 그런지 평행주차가 잘 안돼서 식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이를 어쩌나. 남편도 한국에서는 주차 잘하면서 프랑스에 오자마자 왜 그러냐며 의아해할 정도로 여하튼 평행주차는 엉망이다.
장날이라 차는 많지 거기다 하필이면 1차선 마을 중앙 도로변이라 차를 넣었다 뺐다 애를 먹고 있는데 밖에서 주차하는 걸 봐주던 남편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표정이 싹 굳어서 ‘마을 밖에 세우자’라는 것이 아닌가. 뒤에 기다리는 차도 많고 나도 곤란하던 차에 알았다 알았어하고는 마을 밖 비교적 널찍한 도로변에 주차하고 시장 구경에 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는데, 기어이 사건이 터졌다. 과일 가게에서 우리만 빼고 주문을 받는 것이 아닌가. 난 우리가 줄을 잘못 섰거나 과일을 미리 담아와야 되는 거였나 했는데 남편이 굳은 얼굴로 그냥 가자. 이러는 것. 응?? 이양반이 또 왜 뿔이 났을까 하고는 다른 가게에서 겨우 살구 한 봉지를 사고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잔 할까 했는데 남편이 이런 동네에서는 돈 쓰기 싫다면서 집으로 가자는 것.
야.. 40분 운전해서 여기 겨우 왔는데 온 지 10분밖에 안 지났어. 근데 집에 가자고? 나랑 장난해? 모처럼 주말 나들이에 기분 좋았는데 자꾸 초를 치는 남편 때문에 내 기분도 가라앉기 시작했고, 우리는 차를 돌려 집에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입이 댓 발 나와있는 나에게 남편이 아까는 화내서 미안하다고, 프랑스 사람들이 너무 무례해서 화를 참기 어려웠단다.
내가 주차하려고 애쓰는 동안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 나라에서는 운전면허 시험도 안치냐, 저 아시안 여자보다 우리가 운전 잘하지?’ 뭐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처음에 살구를 사러 갔던 가게에서도 옆에 아주머니가 주인아저씨한테 왜 앞사람(우리) 케어 안 하냐고 했는데 아저씨가 괜찮다고 했다던가.
이야기를 듣고 나니 벙쪘다. 뭐야 나 인종차별당한 거야 오늘?? 한국에서 남편한테 이런 일이 생기면 남편은 ‘허허 괜찮아 난 신경 안 써’ 이러고 내가 불같이 화를 냈었는데, 여기서는 내가 괜찮고(사실 못 알아들었다), 보살 같은 남편이 부글거리다니..
남편에게 화가 나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생겨도 분노 조절 좀 해달라고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그 사람이 그냥 전형적인 무례한 사람이건,
고의적으로 우릴 무시한 인종차별주의 자건,
그 무엇이건 간에 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내가 회사에서 인종 차별을 당한다면 참 쓰라리겠지만,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지나가는 사람이 하는 말 따위에 기분 상해봐야 우리만 손해라고. 그냥 저 사람 인성이 저것밖에 안되는 걸 안타까워하고 치우자고 했다. ‘아이고, 아직도 저런 교양 없는 사람이 있구나’하고, 어때?
남편은 이래서 프랑스에 오기 싫었다느니,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무례한 족속들인지 진짜 꼴 보기도 싫다며 한참을 더 욕하다가 결국에는 알았다고 일요일을 망쳐서 미안하다고 했다.
야, 걱정 마. 내 프랑스어가 유창 해지는 날 저런 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가만 안 둘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