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보다가 '노즈워머'라는 물건을 발견했다. 코끝만 덩그러니 감싸주는 뜨개질 제품이라니. 처음엔 웃음이 나다가도, 점점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매년 겨울마다 코끝이 얼얼해서 손으로 쓱쓱 문질러대던 내게, 이 물건은 구세주처럼 보였다. "이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내 지난 겨울들은 대체 뭐였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장바구니에 넣을까 말까를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상상해 봤다. 코끝에 그 노즈워머를 얹고 거리를 걸어가는 내 모습. 주변 사람들이 눈길을 주고, 지인이라도 마주친다면 "그건 뭐야?"라고 물어볼 게 뻔하다. 나는 과연 그 질문에 "아, 이건 코끝 보온용이에요"라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을까? 내 상상 속의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얼른 노즈워머를 벗어버렸다.
결국 나는 사지 않았다. 코끝이 시린 건 어쩌면 내 겨울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얼얼하게 만들 때마다 나는 비로소 겨울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불편하긴 하지만, 그 얼얼함마저 겨울의 맛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그걸 뜨개질된 작은 조각으로 막아버린다면, 내 겨울은 왠지 맹숭맹숭해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날, 한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은 코끝이 시려본 적이 없단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정말? 겨울 바람 불면 코끝이 안 시려?" 그 말이 충격이었다. 내게는 겨울의 신호처럼 여겨지던 감각이, 누군가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험이라니.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감각이나 경험도 모두의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걸.
결국 노즈워머는 사지 않았지만, 그걸 발견한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코끝이 얼얼해질 때마다, "그 물건을 썼다면 어땠을까?" 하고 웃으며 상상할 수 있으니까. 때로는 이런 사소한 고민도 겨울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코끝이 시린 겨울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나는 그 불편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낭만이 되긴 좀 어렵고, 그냥 한 번쯤 생각해볼 이야기 정도로 남겨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