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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만에 혼자 한 김장

텃밭에서 키운 부실한 배추로 김장하기

by 화이트

결혼한 지 삼십 년이 되었다. 처음부터 김장을 한건 아니지만 식구가 늘자 꾸준히 김장을 해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주위에는 주부 9단의 손맛을 가진 이웃들이 있어서 나는 항상 보조의 역할에 머물러 있었기에 이 나이 먹도록 김장을 할 줄 몰랐다. 양념을 챙겨주고 김치통을 나르다 보면 어느새 김치 속은 버무려져 있고 번개 같은 솜씨로 차곡차곡 담겨있기에 나는 배추에 양념을 발라 본 적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김장 철이 다가오면 이번엔 누구의 손을 빌려야 할까 고민을 했는데 시골집 텃밭에 배추 심어 놓은 것을 떠올리니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볼 엄두를 내보았다.


다음 주부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해서 이번 주말이 김장을 담글 기회였다. 한랭사를 씌워서 키웠기에 농약을 치지 않아도 벌레로부터 배추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고, 11월 말까지 날씨가 따뜻해서 부실하던 배추가 조금씩 속이 차오른 것도 결심하는 데 한몫을 했다. 내가 키운 배추를 뽑아 절여서 혼자 김장을 할 생각을 하니 벅차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시골 생활을 막 시작하던 때, 속이 덜 찬 배추를 밤새도록 절여 너무 짜게 된 바람에 시누이와 함께 했던 그 김장을 모두 버려야 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 후로 배추를 심지 않았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나는 밤잠을 못 자고 배추를 살폈다. 어제저녁에 도착해서 밤중에 배추를 뽑아와 소금에 절여 새벽 세 시에 뒤집고 다섯 시에 배추를 씻었다. 물이 빠지길 기다려 아침을 먹고 나서 양념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배추의 양이 적을 것 같아서 오는 길에 하나로 마트에 들러 배추 한 망을 사 와서 같이 절였다. 커다란 농협 배추는 4등분을 하고 조그만 텃밭 배추는 2등분으로 잘라 김치를 담고 나니 큰 통으로 한 개 반이 채 안된다. 남편에게 다시 배추 한 망을 더 사 오라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소금물에 절여 남은 양념으로 대충 치대어 김치 통을 마저 채워야 한다.


절인 배추를 한 가닥 찢어서 먹어보니 짜지 않고 단맛이 났다. 양념은 시누이가 적어준 레시피대로 했는데 절임 배추 20킬로 기준으로 새우젓 3컵과 멸치젓 3컵을 넣고 매실액 반 컵이 들어간다. 지난번 동네 카페에서 불멍 하려고 온 손님이 직접 담근 연분홍색 새우젓을 주고 가셨는데 색이 곱고 예뻐서 맛은 안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멸치젓은 친정 엄마가 기장에서 늘 담아주셔서 같이 넣었더니 양념 맛이 들큰한 것이 맛있다.


엄마의 김치는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비결은 그냥 기본에 충실한 것이었다. 부재료는 쪽파 정도만 넣고 과일도 배 하나만 갈라고 하셔서 갓이며 사과 같은 건 생략했다. 시누이의 레시피대로 작은 무로 무채를 하나 썰고 하나는 갈아서 넣었다. 생새우는 채식하는 딸을 위해 안 넣었다. (젓갈도 쓰지 말라고 했으나 사찰 김치를 담기에는 나의 내공이 따르지 못하여 실행은 못 했다.)


짜지 않은 김치를 완성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는데 다행히 짜진 않지만 익고 나서 어떤 맛이 나올지 그건 장담할 수 없다. 다음 달에 친정에 가서 경상도식 김장을 한번 더 할 예정이다. 묵은지로 먹어도 맛있는 엄마의 김치는 형제 모두가 바라는 것이어서 엄마는 필요도 없는 김장을 함께 해보자고 의욕을 보이신다.


곁불만 쬐어도 따뜻하다더니 김장은 항상 남에게 맡겨 버리고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내가 온전히 주부가 되어서 주도적으로 김장을 해보니까 대충 흉내는 낼 수 있는 게 세월의 힘인가 보다.


주부 9단의 이웃들이 김장에 쏟는 정성과 집중력은 감히 따라가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밤잠을 못 자며 애를 써보니 그 노고가 보통이 아닌 걸 알겠다. 내년에는 배추 농사를 더 많이 지어서 채식 김장을 본격적으로 해볼까?



텃밭에서 뽑아 온 배추


다 절여서 씻고나니 겨우 이 정도

소소한 김장
일 년에 한 번 먹는 김장 겉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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