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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흐 Oct 23. 2019

내 호의는 여기까지니 더 이상 접근하지 말아 주시길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며칠 전의 일이다. 나른한 오후 낮잠을 자고 있는데 인터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왔나? 택배인가?"하고 인터폰을 봤더니 우리 집은 아니었다. "옆집이겠지 뭐"하고 별생각 없이 누워있는데 갑자기 또 벨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울렸는데 이것은 분명 우리 집에서 나는 벨소리였다.


인터폰에는 낯선 실루엣의 사람이 한 명 보였다. 가끔 가스 검침을 하러 방문하시는 분도 계시기에 그런 분인가 해서 문을 열어줬다. 그랬더니 갑자기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어려운 노인 분들을 돕고 있으니 쌀이든 휴지든, 기타 생활 물품이든 기부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주를 받으러 왔다면서.


비몽사몽 한 상태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신은 절에서 왔으며 안 쓰는 물건이 있으면 기부를 좀 해주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안 쓰는 세탁세제가 2개 보여서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담을 것이 필요하다고 담을 것도 하나 달라고 했다. 너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길래 "뭐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쇼핑백에 세제 1개를 더 담아서 줬다.



해피엔딩은 동화 속 이야기일까?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냥 세제를 받고 바로 가줬으면 좋았을 텐데. 갑자기 고마움을 베풀어줬으니 절에 무엇인가를 달아준다고(또는 태워준다고) 원하는 소망이나 꿈을 말해달라고 했다. 별다른 바람이 없었기에 "기부를 받는 분들이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적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바라는 것이 없는지, 꿈이나 소망, 어려운 일들은 없는지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없다고 하고 앞에 얘기한 대로 적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름이랑 생년월일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대낮에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무엇인가를 기부해달라는 사람에게 개인정보를 주려니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름은 영어 이름으로 말해주고 생년월일은 그냥 지어내서 말해줬다. 그랬더니 갑자기 대뜸 무슨 띠냐고 물어봐서 잠시 뜸 들인 뒤 돼지띠라고 말해줬다. 자다가 일어나서 두뇌 회전이 빠르지 않았기에 치밀한 계획을 짜내어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랬더니 자기가 아는 동생은 소띠라면서, 내가 말한 생년월일이 지어낸 것이 아니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요즘은 개인정보 같은 거 구글에서 50원이면 다 살 수 있어요. 뭐, 별다른 거 하는 거 아니니까 그냥 말해주세요." 아하? 요즘은 개인정보도 구글에서 50원이면 다 살 수 있는 시대인가 보다. 뭐랄까. 위협적이고 협박하는 투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무례했다. 건물 입구에 있는 문의 비밀번호를 무시한 채 다른 거주자가 들어올 때 몰래 같이 들어와서 여러 집 곳곳의 벨을 누르며 거주자들의 일상을 방해하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호의는 여기까지니 더 이상 접근하지 말아 주시길

영화 부당거래

낯선 방문객은 일상의 흐름을 깬 것도 모자라서 오늘 하루의 내 기분을 모두 망쳐버렸다. 오히려 자기가 더 기분 나빠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이 문전박대당하고 욕을 먹는 경우도 많다면서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또 손금을 봐준다고 한다. 도대체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영화 부당거래의 대사가 하나 떠올랐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그 대사. 대낮의 낯선 방문객은 내가 얘기를 들어주고 물건까지 내주니까 기세 등등해서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영화 베테랑의 또 다른 대사가 하나 떠오른다. "하, 참. 어이가 없네?"


내 호의는 여기까지니 더 이상 접근하지 말아 주시길. 


정말 베풀어야 할 때 머뭇거리게 되는 건 아닐까?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초반부터 강하게 거절해야겠다. 내 소중한 시간도 날리고, 하루의 기분도 날리고, 선의의 마음까지 날려버렸다.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 둘 요구사항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분명 마지막에는 또 다른 요구사항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많아질수록 "정말 베풀어야 할 때 머뭇거리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길에서 쓰러진 아저씨를 도와주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와주다가 갑자기 납치되지는 않을지에 대한 불안한 마음. 주변에 차가 한 대 계속 정차해있었는데 저 차가 바로 납치범들의 차가 아닐지에 대한 생각들. 세상에는 워낙 많은 이슈들이 있기에 순도 100%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돕기란 쉽지 않다. 


앞서 낯선 방문객이 말한 '시주'의 뜻은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승려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는 일을 말한다. 나는 조건 없이 베풀었지만, 돌아온 것은 상대방의 계속되는 조건들이었다. 시주의 정확한 뜻을 안다면 그 의미 그대로 행동해주었으면 좋겠다. 


낯선 방문객과 작별 인사를 한 뒤 30초 정도 뒤에 또 다른 인터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의 집에 살면서 인터폰 벨소리를 하루 중 제일 많이 듣게 되는 순간이었다. 부디 세제들이 어려운 노인분들에게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라는 책이나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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