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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Oct 04. 2023

부자, 오 헨리 <크리스마스 선물>

부의 재분배 vs 부의 추월차선

사람들은 고래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또 부자가 되고자 고군분투했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재테크와 부의 축적에 관해 방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 가족 7남매 중에도 한때 갭투자로 아파트를 날리고 주식투자로 2000만원을 잃은 사례가 있다. 그래 나는 부자는 바라지 않고 그저 힘들게 번 돈은 잃지 않고자 가끔 그런 류의 책을 읽곤 했다. 도대체 돈좀 모으려다 가난으로 다시 주저앉는 것. 우린 무슨 에러를 갖고 있어 어리석은 실패를 반복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중에는 <부의 추월차선>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었다. 제목이 상당히 임팩트가 있지 않은가? 추월차선 곧 더 빨리 부자가 되기 위해 노하우를 나누는 책 같았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논하는 바, 부를 축적하는 비법과 실제 구현한 능력들이 잠깐은 부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보단 더욱 강하게. 큰 답답함과 회의도 동시에 밀려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사회생활 하면서 만난 부자들-그중엔 준재벌급 부자도 있었다-중에서는 진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분들은 별거 없는 내가 당당하고 심지어 충만한 기쁨을 머금고 사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직장동료들도 "어쩜 1년 내내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고 얼굴이 밝아요?"라고 곧잘 묻는다.


성경의 달란트 비유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살려 열심히 결실을 남기는 것은 절대자의 명령이다. 부도 그런 결실중 하나에 들어갈 수 있다. 즉 적법한 절차대로 자연스럽게 부자가 되는 것은 악이 아니다. 그러나 그 부에는 절대자가 심겨놓은 또 다른 오묘한 순리 내지는 자연법이 있다. 그 부를 혼자 독식하지 말고 나누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유명한 구절이 있지 않은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가복음 10장 25절) 교회사에서 한때는 모든 부를 버리고 거지처럼 살았던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흠모의 대상이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 부자가 된 하나님의 사람들도 꽤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요셉 등등. 사실 이런 이유로 교회 안에서도 고지론자(청부론)와 저지론자(청빈론)들이 치열하게 격론 하거나 암암리에 신경전을 벌이는 웃픈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고지론도, 저지론도. 부자가 전자(부의 적)에 몰입하다 에너지를 다 쓰고는 후자(부의 재분배)를 미처 읽지 않는 불완전한 읽기처럼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느끼는 불공정해 보이는 빈부격차는 양쪽 모두에서 덜 읽은 독서와 씁쓸한 뒷맛이 닮아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의 세계를 보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옛말에 "콩 한쪽도 나눠 먹으라"라고 했다는데. 왜 어른들은 하나를 가지면 두, 세 개를 더 갖으려 심통을 부릴까.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은 베풀진 못 할망정. 고율의 사채이자로 숨이 턱끝까지 차있는 이들을 아예 벼랑 끝으로 모는 것일까. 도대체 돈은 무엇이고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 돈을 많이 축적한 이들은 진정 행복한 것일까?


어른들의 세계를 보며 이해할 수 없는 다른 한 가지는. 왜 그들은 “남 탓”이 많고 “남이 그것을 해야 한다”며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것일까? 


우리 집 가족들은 대부분 어머니를 통해 배워서인지 자기 몫의 수고는 본인이 감당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나아가 형제, 자매가 돕고 사는 것도 익숙했다, 때로 그것이 손해가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책임과 희생은 마치 ‘어른’이라는 명함을 얻기 위해 당연히 밟아야 하는 고급진 훈련 같았다. 무엇보다 신앙의 깊은 맛을 볼수록 이것은 우리 집안의 가풍이 아니라. 절대자가 세상에 선명하게 새겨놓은 삶의 순리이며 진리와도 결을 같이 하는 행보임을 깨달았다.


나의 호기롭고 일면 괘씸한 이런 호기심은 이내 나의 인생여정에 주석처럼 따라다녔다.

“너 그때 왜 그렇게 했어?”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또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내 삶의 마디마디 저 밑바닥에 조심스레 웅크리고 있는 질문. 차마 대놓고 말하기엔 빈자와 부자 양쪽에서 힐난과 책임공방이 시끄러울 것 같은 그 주제.


"나부터" 부의 재분배, 이것은 내가 오래 고뇌하는 주제중 하나였다.      





인간들은 종종 말한다. 왜 절대자(하나님)가 선하다면서, 세상은 불공평하고 빈부격차는 더 커지냐고 삿대질을 하고 입에 게거품을 물곤 한다. 그러나 인간사의 여러 고통의 문제가 그렇듯, 빈부격차에 대한 답도 자연법처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DNA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내가 망할 것 같고 손해 볼 것 같아 차마 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니 타인에게 하나를 주면  한 개 이상은 돌아와야 한다는, 우리의 얄팍한 셈법에 함몰되어 답을 알지만 인상만 잔뜩 찡그리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금덩어리를 이고서 자기 늪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는 부자의 모습은 돈을 덜 가졌다는 태반의 사람들도 동일하게 집착하고 있는 탐욕이다. 그들은 부자를 비난하면서 동시에 돈을 잘 못 버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것일 뿐. 좀 더 움켜쥐고 더 가지려는 마음은 부자와 진배없을 때가 많다.

 

가난한 자와 부자가 물과 기름처럼 대치 국면에 접어든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태고부터 세상엔 획일적인 부의 평등은 없었다. 고.이희돈 박사(전. 세계무역센터협회 수석 부총재)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성경 출애굽기에서 12지파에게 땅 분배시 하나님께서 아주 획일적이고 균등하게 배분해 주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지파끼리 서로 돕고 나누라”는 미션을 남겨 준 거라고. 다만 인간들이 탐욕스럽고 죄악되어 그 미션이 잘 구현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즉 우리의 죄때문이라고 말이다. 덜 가진 자는 피해의식과 적대감으로 부자들을 공격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반면 더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고 심지어 편법을 뻔뻔하게 자랑하며 흉측한 몰골로 좀비처럼 떠다닌다. 이상한 것이 이상하지 않은 정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 실사판 세상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서는 사회시스템적으로 복지나 여러 정책들을 사회 저변에 깔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빈부격차에 늘 허기진 이유는 무엇일까? 없는 자는 세상 시스템이 빈부격차를 더 벌여 놓는다고 말하고, 부자는 왜 이렇게 생살 같은 내 돈을 세금으로 뜯어가냐며 으르렁 거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의 재분배 역시 국가나 여러 비영리기관에 내맡기고 나 몰라라 한다. 그리곤 뿌리 깊은 빈부 양 극단의 적의를 뜨겁게 달구는데 각자 한몫씩 한다. 그렇게 빈부격차는 무서운 사회 갈등으로 심화된다.


이 주제를 말하는 나는 어떻냐고요?  나는 이 거대 담론에 대해서 능력 많은 투사처럼 떨쳐 일어날 수 없었다. 내가 머리가 탁월한 것도 인맥이 특출난 것도 능력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으니깐.


그래 작고 작은 나는 그저  “지금, 여기 나의 일상 속에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적용하고 도전하고 싶었다. 나를 잘 아는 직장동료, 우리 회사 대표님도 가끔은 내가 가족을 위해 과하게 희생하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게 말하곤 했다. 대놓고 말하진 못하고 에둘러서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 언니, 오빠는 저보다 더 많이 희생했어요. 저는 그에 비할바가 못 되어요.”라고 말이다.





가령 나는 돈으로 희생을 했다면, 우리 큰 언니와 둘째 언니는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더 큰 희생을 치러냈다. 놀라운 것은 요즘도 내가 언니들이 동생들 때문에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면 말한다.  “다 인생에 닥치면 그렇게 하는 거고 당연한 거야. 그런 말 하지 마.” 그러면서도 입가에 잔잔한 미소는 숨길 수 없다. 동생이 자신의 희생을 기억하고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오랜 서러움에 위안이 되나 보다.


부의 재분배. 나는 언니들이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해 자신의 스펙을 포기한 희생 역시 부의 재분배적 행보라 여겨진다. 그리고 내가 더 능력이 생기면 그 언니들에게 꼭 보은하리라 결의에 차있다. 형제간 칼부림, 부부간 서로의 탓, 이웃간 소송, 묻지만 흉악범, 고독사, 노인문제 등등. 많은 경우 부의 재분배는 우리 가까이에서 인간문제의 작은 해법을 제공해 준다. 근본적인 해법은 진리의 문제이므로 그것은 다음에 기술하겠다.    

  

     



  

천재와 썸을 탈 때부터, 나는 가끔 사회공헌과 기부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그리고 우리가 연인이 되어서도 조심스럽게 천재에게 말했다. 혹여 묶여있는 부동산 상속재산이 있으면 나중에 재단을 세워 어려운 사람들 돕는데 보태면 좋겠다고. 그가 상속재산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도 찬성했다. 그는 연애 초기부터 좋은 기부자가 되는 방법을 찾아 보기도 했다. 물론 우리 살기도 빠듯한 세상에서 이것이 얼마나 구현 가능할지 모르지만 일부라도 꼭 실천하고 싶다. 나아가 의사인 천재를 통해 보건의료계쪽 사람들도 이런 "나부터" 부의 재분배에 좀더 눈이 떠가기를 조심스레 바래 본다.


나는 어제도 천재에게 말했다. “그대(천재)는 일명 의료선교사야. 성경을 들고 말씀 전하는 것만이 선교가 아니야. 만민제사장설이라고 있잖아.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본업에 최선을 다하면서 창조의 질서대로 세상을 세워가면 곧 그 삶이 선교인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총기가 새로워지며 얼굴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10년 전 지금의 직업(헤드헌터)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나의 고뇌였던 부의 재분배에 대해서 가끔 입을 열 기회가 주어지곤 했다. 내 본래 인맥에선 잘 사는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 혹은 평범한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지금 직장이나 여타 모임에서 만난 분들 중에는 이른바 사회에서 더 많이 가진 자, 기득권자가 꽤 있는 것에 오묘한 섭리를 느낀다.   

  

일로 만난 분들 중에, 나를 인간적으로 잘 알고 도와주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그중 잘 나가는 모 벤처 CEO들께서는 상장하면 비영리 재단을 설립해서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분들도 생겼다. 그외 이른바 잘 나가는 대표나 임원. 아니면 스톡옵션으로 하루아침에 20억, 때론 100억씩 돈을 번 임원분들 중 친한 분들에게도 가끔 농담반 진담반으로 조심스레 얘기한다. “와,너무 축하해요. 이젠 기부 좀 하셔야겠네요” 내가 아는 어떤 어르신은 아버지의 재산만도 1조가 넘으시고 고객사 중에는 강남에 꼬마빌딩을 가진 병원장도 있다. 그분들도 나의 이런 신조를 어렴풋이 알고 계시다. 내가 정치인이나 유명인은 아니지만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루트가 뚫렸다는 것, 그리고 이런 나를 다행히 긍정적으로 봐주시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사실 내가 봉사하는 것이나 나의 나눔이 알려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생색내기 기부나 봉사 같아서. 아니 적어도 나의 인격에서 나란 인간은 그럴 수 있기에. 그러나 오랫동안 묵히고 묵힌 나의 고뇌. 부의 재분배란 주제를 꺼내면서 필연 “그럼 너는 실천했냐?"는 핀잔 어린 추궁에 조심스레 입을 열어 본 것이다. 말로 떠들어댄다고 속 터져하는 민초들의 마음을 나도 오랫동안 지켜봤기에.


우리 각자는 결핍이 많다. 그러나 나보다 결핍이 더 많은 사람들은 주변에 항상 있다. 그들은 TV 기부 프로그램에 나온 극빈자만이 아니다. 직장의 경비원, 청소부 어르신, 여러 배달노동자 심지어 내 가족이나 친척, 가까운 이웃, 직장 동료일 수도 있다. 즉 내 손이 금새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들은 늘 있다. 그래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아주 작게 또 순리대로 작은 정성이면 된다. 엄청난 기부금일 필요도 없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냉수물 한그릇 건네는 것도 작은 부의 재분배가 될 수 있다. 작은 관심과 작은 친절은 어떤 의미에서 거액보다 더 진정성 있는 나눔일 수 있다.

 

그때 돈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세상이, 그 불행의 해법을 자연스레 터득해 가지 않을까. 오늘도 점점 더 화창하고 맑아질 세상이 기대 된다.      






 

<부자, 오 헨리 크리스마스의 선물>과 연관된 청년 클레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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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古來) : 1.옛날부터 현재(現在)까지  2.자고이래(自古以來)의 준말

**게거품 :  ‘게거품’은 본래 ‘게가 토하는 거품’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의미보다는 ‘동물이나 인간이 괴롭거나 흥분하였을 때 입에서 나오는 침’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불편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나오는 게의 거품과 괴롭거나 흥분할 때 나오는 동물이나 인간의 침이 다를 바 없어 쉽게 의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출처: 게거품 (naver.com))








오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의 선물>



오헨리가 1906년 발표한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원제는 The Gift of the Magi. 즉 동방박사의 선물이다. 오헨리는 예수의 탄생을 예견하고 선물을 가져온 동방의 현자는 이름 그대로 현명했을 것이므로,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교환가능한 선물을 가져왔을 것이나, 짐과 델라와 같이 그렇지 못한 선물을 주고받더라도 현자의 선물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줄거리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사는 부부 짐(제임스 델링햄)과 델라가 있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짐은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시계가 자랑거리였으며, 델라는 길고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었다. 어느 해 성탄절 날, 델라는 남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사람들에게 구두쇠라고 비난받으면서도 아껴 모은 돈은 고작 1달러 87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 돈으로는 도저히 짐에게 근사한 선물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델라는 짐의 시계와 어울리는 품위 있는 시곗줄을 발견하고, 그 시곗줄을 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 위해 자신의 길고 고운 머리카락을 잘라서 20달러에 팔았고 그 돈으로 시곗줄을 산다. 그렇게 시곗줄을 짐에게 선물했는데, 짐은 델라에게 주려고 시계 파는 가게에서 자신의 시계를 팔아서 최고급 머리빗 세트를 주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델라는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짐은 괜찮다며 델라를 달래며 이들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오헨리는 동방의 현자들이 예수에게 보낸 선물만큼이나 이들의 선물이 값지다고 평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 세계 옛날이야기(まんが世界昔ばなし, 1976)에서도 수록되었다. 델라는 여기서 금발의 긴 머리로 나오는데 마지막에 거의 짧은 머리로 나와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면서 성탄절 노래가 흘러나오며 끝난다. 참고로 원작에서의 델라 머리 색깔은 갈색이다. 80년대 MBC 더빙 방영판 어린이 명작동화에서는 성우진은 짐을 이인성, 델라는 기경옥이 연기했다.     


참고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오헨리가 이 소설을 발표할 당시의 미국 달러 가치를 2018년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델라의 1달러 87센트는 2018년 기준 약 52달러, 시곗줄의 21달러는 약 530달러이다. 물론 화폐 가치와 실제 물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 또한 고려해야 한다.

 


출처: 크리스마스 선물 - 나무위키 (namu.wiki)






오헨리


윌리엄 시드니 포터(영어: William Sydney Porter, 1862년 9월 11일 ~ 1910년 6월 5일)는 미국의 작가이자 소설가로, 오헨리(영어: O. Henry)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전이 있는 짧은 소설을 주로 썼다. 또한 기 드 모파상의 영향을 받아 풍자·애수에 찬 화술로 평범한 미국인의 생활을 그렸다.     



생애

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1862년 10월 11일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그린즈버러에서 앨저넌 시드니 포터와 메리 제인 버지니아 스웨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가족은 할머니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187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촌이 경영하는 약국의 조수로 들어가 1881년 약사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1882년 포터는 제임스 홀을 따라 텍사스로 이주하여 그의 아들 리처드 홀의 목장에서 일하였다. 그곳에서 포터는 독일, 스페인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의 음악을 배웠다. 1884년 오스틴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서 포터는 제도사, 은행원, 기자 등의 직업을 전전했으며 습작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포터는 오스틴에서 극단에 들어가 기타와 만돌린을 연주하였다. 1887년 17세였던 애솔 에스테스와 결혼하였다. 1887년 리처드 홀이 지주협의회의 의장이 되자 그의 권유로 텍사스 제네럴 랜드 오피스의 제도사로 근무하였다. 1888년 아들이 태어났으나 태어나자마자 사망하였다. 1889년 딸 마가릿 워스 포터가 태어났다. 리처드 홀이 1890년 낙선하자 포터는 은행원, 기자등으로 일하였으며 첫 작품 《구르는 돌》(The Rolling Stones)을 발표하였으나 1500부가 팔리는데 그쳤다.     


포터 가족은 1895년 휴스턴으로 이사하였다. 포터는 우체국의 고정 작가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스틴에서 재직하였던 은행에서 포터가 재직 중 계산 실수를 범했다는 이유로 고소하여 구금되었다. 포터는 장인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장인의 집에 의탁하였다. 첫 재판은 1896년 7월 7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포터는 처음에는 뉴올리언스로 이후 온두라스로 도피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바나나 공화국을 빗댄 《양배추와 왕》을 썼다.     


포터는 1897년 아내 애솔이 결핵으로 죽어간다는 전갈을 받고 오스틴으로 돌아왔다. 애솔은 1897년 7월 25일 사망하였다. 포터는 체포되어 1898년 2월 횡령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5월 25일 오하이오 교도소에 수 번 30664번으로 수감되었다. 포터는 약사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복역 중에 야간 약국 담당으로 일하였다. 복역 중에 포터는 여러 필명으로 단편 소설을 출간하였다. 오헨리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휘파람 부는 딕의 크리스마스 스타킹》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그의 이름 역시 오헨리로 널리 알려졌다.  

   

1901년 출감한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사한 장인을 찾아가 11살이 된 딸 마거릿을 만났다. 장인은 마거릿에게 포터가 사업 때문에 멀리 여행 갔다고 말하여 두고 있었다.     


1902년 《뉴욕 월드 썬데이 매거진》이 그의 글을 수록하길 하자 포터는 뉴욕으로 이사하였다. 포터는 이 잡지에 381편의 단편의 실었다. 1907년 포터는 세라 린지 콜먼과 재혼하였다.   

  

1908년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글쓰기를 중단하였다. 1909년에 사라가 떠나간 뒤 더욱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10년 6월 5일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후 뉴욕 시에 의해 노스캐롤라이나의 애슈빌에 묻혔다. 1927년 그의 딸 마가렛 역시 사망하여 아버지의 옆에 묻혔다.       


출처: 오헨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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