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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Oct 09. 2020

8월의 일, 위기의 8월

 8월에 제일 많이 했던 말은 "날씨가 왜 이래?" 였던 것 같다. 갑자기 비가 오거나, 해가 비치고 있는데도 비가 오거나, 내 눈 앞은 비가 오는데 내 뒤쪽은 비가 안 오는 희한한 일들이 많았다. 인간이 코로나로 시름하는 동안 대자연도 같이 시름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름이 여름 같지 않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고.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 옷 정리를 하려고 옷장을 열어보니 한 번도 입지 않은 여름옷들이 여러 벌 되었다. 조심조심 출근을 하긴 했지만, 생존이 달린 외출 외의 다른 외출은 극강으로 조심하다 보니 외출복을 입을 일이 상당히 줄어들었고, 대신 내복의 노화가 더 빨리 진행되었던 것 같다. 



 8월엔 아이들이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많이 시켰다, 물론 집에서. 내가 하면 5분이면 끝나는 일을 아이들과 함께 30분을 넘게 했다. 먹을 것도, 청소도, 빨래 널고 걷고 개키는 것도. 날씨도 그렇다 보니 집에서 그렇게 있는 게 더 낫기도 했다.

 내가 사는 성남시에서는 아동수당을 현금이 아닌 카드 포인트로 주기 때문에 웬만한 식재료들은 포인트 사용이 가능한 마트에서 사용했는데, 마트에 가기도 마음이 편치 않아 나도 드디어 쿠팡에 입문했다. 15000원 이상 주문하면 로켓 프레시 상품을 밤에 주문해도 아침이 오기 전에 받을 수 있었고, 그런 편리함은 "시국이 이런데 먹는 거라도 맛있는 거 먹어보자"하며 평소라면 시도도 안 했을 가격대의 빵이나 요거트, 쥬스 등을 주문했다. 맛있는 것을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고, 많이 먹으면 살찌니까 유튜브 홈트를 하진 않아도 틀어 놓기라도 했다. 먹는 건 먹는 것대로 먹고 긴장은 긴장대로 했던 것 같다. 살찔까 봐.


  작년 8월엔 뭘 했나 기록을 뒤져보니 친구네 가족들과 계곡이 있는 식당에서 백숙 먹고 계곡에서 놀기도 했고, 아웃렛이나 공원으로 괜한 외출도 많이 했고, 아이들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에어바운스를 빌려 물놀이를 두 번이나 했었다. 물놀이가 가능한 놀이터를 찾아가기도 했고, 책방 모임도 있었고, 예쁘고 멋진 카페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모든 것이 당연했고 모든 것이 가능했던 2019년의 8월과 판이하게 다른 8월을 꼭 1년 후에 맞을 줄은 아무도 몰랐기에 공평한 재난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약한 사람들을 더 강하게 훑고 가는데.

 


 고구마 딱 이만큼이 7980원이었다. 보통 같았음 안 샀을 텐데 딸래미가 노래노래를 하다가 오열까지 갈 수준이라 샀다. 내일이면 싸지겠지, 내일이면, 내일이면... 했는데 결국 싸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오른 날 샀다. 노래노래 할 때 살 걸 괜히 오열까지 하게 질질 끌었나 보다(맛있긴 했다). 대형마트가 아니라 동네마트라 더 비쌌을 수도 있지만 이때 고구마, 호박 등 몇 가지의 가격이 우리가 아는 그 가격이 전혀 아니었다. 오늘(10월8일)도 동네마트에서 대파가 거의 5천 원 돈이라 사지 못했다.


 나는 어쩌다 외식한다 생각하고 약간 오른 가격의 식재료라도 필요하면 살 수 있지만, '어쩌다 외식한다'라는 가정도 어려운 사람들에겐 이상기후와 코로나로 인해 오른 물가로 밥상을 준비하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사실 마스크도 그랬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아이들도 이 마스크 저 마스크 써보더니 자신들에게도 숨쉬기 편한 마스크가 따로 있었나 보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새부리 모양의 마스크였다. 날씨도 요상했던 날 새부리 모양 마스크를 사기 위해 집에서 버스로 4-5정거장 떨어진 대형 병원이 있는 근처의 약국을 돌며 그 마스크를 찾았는데 다 없었고 겨우 한 약국에서 5개짜리 마지막 남은 한 묶음을 살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이래저래 고생해서 사온 마스크라며 착용하라고 했는데, 자기한텐 작다나 꽉 낀다나.. 얼굴 크고 머리 크게 낳은 건 내 잘못이지. 아이들은 분리수거 쓰레기통을 뒤져 "이 봉지 안에 있던 마스크가 제일 좋아"라고 했다. 결국 다음 날 다시 나가 다른 약국에서 특정 브랜드의 마스크를 찾았고, 그 마스크는 1500원이 아닌 1800원이라고 했다. 어우. 공적 마스크 기간이 끝나서 가격이 올랐다고. 찾기 어려웠으니 비싸더라도 사야 했는데, 겨우 300원 차이라도 10개면 3000원이고, 3000원이면 보통 애호박이랑 느타리버섯 살 수 있는데.


힘들다. 사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갈수록 힘들어진다.

보통 40-50대의 인생은 힘든 거라고들 하더라.

그렇다면 이 코로나 시기를 40대에 겪는 것으로 힘든 것을 퉁치면 좋겠다.



아이 둘이 뭐 때문인지 신나서 너무 방방 뛰고 소리도 지르던 날, 나는 내 감정조절에 실패했고, 남편이 퇴근하고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아이들이 잠들고 조용해진 밤, 그 날 내가 제일 잘한 일은 목숨을 끊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밝고 건강한 게 뭐 그리 거슬릴 일이라고 목숨을 운운했을까 싶지만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가끔 정도는 아니다. 아주 드문 일이다, 이젠.


 확진자가 세 자리 수로 나오는 게 나는 다른 지방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바로 수도권의 일이 되었다. 400명이 넘었는데 회사 가도 되나, 어린이집 보내도 되나, 큰 아이 다니는 학교는 아직 방학중이긴 했는데, 회사에서 재택근무나 휴관 공지가 없으니 아이도 어린이집에 보낼 수밖에. 대구에서 아직 두 자리 수였을 때 즉시 휴관공지 내려졌던 것에 비하면 너무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우리 엄마는 마스크 안 쓰고 학교 다녔데!"

 "2020년 이전에는 마스크는 연예인만 쓰고 다녔데!"

 "'코로나'는 원래 맥주 이름이래!"

이런 말을 하고 다니게 되지 않을까 싶은.


정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가.

이고 지고 곁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건가.



 8월 넷째 주엔 일을 빼고 주욱 쉬다가 금요일인 8월28일에 출근을 했었는데, 이렇게 치솟는 확진자수에 비해 별 다를바 없는 직장의 분위기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오히려 무서웠다. 그저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해달라는 당부뿐. 내가 너무 오버하며 나와 아이들을 집에 가뒀나 싶기도 하고, 이게 맞는건가 싶기도 했다. 뉴스와 기사를 보며 집 안에만 있었는데 바깥이 너무 멀쩡해서 혼란스러웠던 그 날의 기분을 지금도 기억한다.


8월, 

살아있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날들이다. 특히 8월 말엔.


+


8월28일 퇴근할 때 즈음 급하게 공지가 떨어졌다. 다음주부터 2주간 휴관하겠다고. 

8월30일 0시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는 2.5단계로 격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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