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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늬 Oct 24. 2021

#4 여기 사랑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사랑이 식는 사람과 사랑이 많은 사람과의 사랑

여기 사랑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사랑인데,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항상 마음이 짜게 식었다. 그래도 이사랑은 사랑꾼이었다. 매번 사랑을 부지런히 찾았으며 그녀는 이뻤기 때문에 쉽게 사랑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별로 노력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좋아해 주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매번 쉽게 사랑을 외쳤다. 어떤 사람은 사귀지도 않았는데 사랑한다고 따라다니기도 했었고, 사귀는 첫날에 자신이 지금껏 사랑했던 어떠한 사람들보다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사랑도 어렸을 적에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딱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그때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헤어지자마자 1주일도 안되어 새로운 여자친구와의 사진을 SNS에 올리며 '내 사랑'이라고 쓴 걸 보자마자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웃긴 말인지 알게 되었다. 사랑은 사랑이란 자주 말할수록 흩어지고, 표현할수록 흐릿해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살려고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다. 세훈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과 사랑을 하였고 그들에게 사랑을 가득 주었다. 세훈은 항상 사연 있는 사람들과 사랑하였는데, 그들은 헤어지고 나면 세훈과의 추억으로 그 사연들을 덮고, 보통 사람들과 같은 보통의 연애를 할 수 있었다. 세훈에게 사랑이라는 말은 어쩔 수없이 새어 나오는 말이었다. 사랑을 할 때면 세훈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컵이 만들어졌다. 그 컵 안에 사랑이 가득 찼는데, 컵에서 흘러넘치는 바로 그 순간에 세훈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지만, 매번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면 저 뱃속 어딘가에 심장과 함께 왈칵하고 쏟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세훈은 사랑에 상처받아도 그 상처까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은 세훈을 만나자마자 결혼을 생각했다. 사랑은 그가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 특히 좋았다. 그러나 사랑은 불안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식을 것 같아서. 결국 사랑은 세훈과 계속 만나기 위해서 결심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사랑이 없어지는 사랑에 대하여. 세훈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랑의 눈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세훈은 사랑이란 말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참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세훈은 말이 아닌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빠짐없이 기억했으며, 그 기억들을 가지고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세훈은 기념일만 되면 하루종일 입술이 꼼지락 꼼지락 거렸다. 그런 노력으로 인해 사랑은 사랑을 믿기 시작했다. 프러포즈 할때에도 사랑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매번 가을이면 찾아가는 바닷가에서 세훈은 프러포즈했다. 짭짤한 바다 냄새와 가녀린 폭죽 소리가 사랑이라는 말이 없는 결혼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었다.


드디어 둘은 결혼했다. 그리고 첫날밤, 사랑은 세훈에게 말했다. 이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내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그러니 제발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세훈은 그런 사랑의 말을 듣자마자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정말 너무나 그 말을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세훈의 머릿속 어딘가에 사랑한다는 말이 삭제된 것 같았다. 세훈은 당황했다. 사랑에게는 처음으로 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좀 더 좋은 타이밍에 하고 싶다고 애 둘러서 말했다. 세훈의 컵 안에는 꽃다발과 산책과 수많은 기억들이 혼재되어 있어서 사랑의 컵에서 흘러나왔던 사랑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 세훈의 입술에서 사랑이 삭제되었다. 사랑은 계속해서 첫날밤 말고 더 좋은 타이밍이 도대체 언제냐고 계속해서 세훈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세훈은 괜히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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