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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표고 Mar 26. 2024

배용준에 꽂히자 러브레터를 받다

나는 두 살 차이 나는 언니가 하나 있다. 언니는 어릴 적부터 눈에 띄게 예쁘고 똑똑해서 선생님들과 또래 친구들 누구에게나 주목받고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래서 난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언니와 함께 다닌 4년 내내 oo이 동생으로 불렸다. 나도 6년 내내 반장도 하고 성적도 좋은 편이었는데도 나 자체로 주목받기에는 언니의 후광이 너무 엄청났다.


기막힌 사연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나는 걸스카우트를 내내 했었는데 걸스카우트 선배 언니들에게 엄청나게 인기가 있는 전교 회장 오빠가 있었다. 그런데 그 오빠가 우리 언니를 좋아해서 엄청 티를 내고 다녔지만 언니가 사귀어주질 않자 오빠 혼자 안달 나 있었다. 그랬더니 그 상황에 엄청 질투를 느낀 걸스카우트 선배 언니들이 언니 동생이 나라는 것을 알고 걸핏하면 나를 괴롭혔다. 아니 내가 그 오빠 사랑을 받았더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 회장오빠는 단지 우리 언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나한테 잘해주곤 했는데 또 그걸 질투하는 언니들도 있었다. 그렇게 언니가 졸업할 때까지 어이없는 질투와 시기로 인한 괴롭힘은 계속됐다.


예쁜 애라는 타이틀은 늘 언니가 가져가다 보니까 나는 예쁜 거 대신 멋이라도 있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잡지나 티브이에 나오는 스타일을 공부했고, 동네 아동복점에서는 성이 차질 않으니 엄마를 졸라서 명동의 보세 가게에서 쇼핑을 하고 대학생 언니들이 입는 옷을 사입기도 했다. 하나 둘 내 옷에 관심을 갖고 어디서 샀는지 궁금해하는 친구들이 늘어났고, 그런 친구들의 관심에 어깨가 으쓱했다.



그러다 나의 스타일의 대변환기가 찾아오는데, 그건 중2 겨울, 드라마 파파 때문이었다.


드라마 파파는 이영애와 배용준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로, 단발머리에 머리띠를 한 이영애의 스타일이 대히트를 쳐서 전국의 모든 여중, 여고생이 다 따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꽂힌 것은 이영애의 스타일이 아닌, 배. 용. 준.


짧게 친 상고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 왜 이렇게 멋있고 귀엽다고 느껴졌을까. 아니. 멋있고 귀여운 거 맞는데 그게 왜 따라 하고 싶었을까.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첫 쇼트커트를 하게 되었다.



꽤 긴 머리였던 내가 새 학기가 시작되어 쇼트커트를 하고 뿔테 안경까지 쓰고 나타나자 친구들은 무슨 일이냐며 놀랐다. 내가 파파의 배용준을 따라 했다고 하자 닮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영애 스타일을 한 친구들이 가득한 교실에서 나 혼자 배용준 스타일로 있는 것이 왠지 나쁘지 않았다.



한 달 후, 학교에서 축제를 하는데 어쩌다 내가 사회를 맡게 됐다. 사복을 입고 하는데 배용준 스타일에 치마는 안 어울리니 삼촌의 양복을 빌려 입고 사회를 봤다. 그날 여러 선생님들께서 저 사회를 보는 남학생은 누구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축제가 끝나고 난 처음으로 받았다. 러브레터를.



내가 꽤나 남자애 같았는지 그 축제 이후로 몇 명의 여학생들이 나에게 편지를 주고 집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전화를 걸어왔다. 사귀자는 건 아니고 그냥 언니가 너무 좋다는 동경에 가까운 느낌의 편지였는데 동성친구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지는 않기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긴 머리를 하고 다닐 때는 관심을 1도 받지 못하다가 머리를 커트하고 이렇게 되니까 남자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궁금해지긴 했다. 인기 없는 oo이 동생으로 살았던 초등학생 시절보다는 짝퉁 배용준으로서 사랑받았던 중3시절이 더 즐거웠으니까.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시 머리를 길렀고 보이시한 이미지가 사라지자 나는 다시 평범함 속에 묻혔다. 다행히 언니와 중학교부터 학교가 달라지면서 oo이 동생이란 타이틀과 멀어지자 나는 그냥 나로 살면 되니까 평범함이 나쁘지 않았다.



어른이 되기까지 수많은 스타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금은 나만의 스타일을 찾았다. 그래서 예전처럼 왜 나는 언니만큼 예쁘지 않을까를 한탄하며 거울 속의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든 절대 비교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각자의 아름다움을 갖고 태어나는 것인데 누가 더 예쁘고 못나고를 비교하는 거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절박한 마음이었어서일까. 나는 누구에게든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찾아 칭찬하고 응원하는 것에 진심이다.



또한 감사하게도 이제 내 옆에는 나를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봐주는 반려자가 있다. 그 덕분에 나는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머리스타일을 바꿀 필요 없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하면 된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안 어울리는 머리가 됐어도 그래도 예쁘다 해주니 다시 기르면 그만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난 나 좋은 모습대로 살면 돼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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