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규원 Apr 01. 2024

쪽 정원에서의 낙원 일기

사람들은 꽃과 정원 하면 봄을 많이 떠올린다. 화훼단지가 분주해지고 황량한 겨울에서 처음 다채로운 색을 볼 수 있는 게 봄이니 어쩌면 당연할 수 도 있다. 그렇지만 정원이 야성적이게 무성한 모습에 원숙하면서도 때로는 에로틱한 시기는 여름과 가을이다. 

당시 이사를 주택으로 가서 정원을 꾸미던 시기는 내 인생에 가장 바쁜. 직장에서 갈아지던 때였다. 동시에 5-6개의 용역을 수행하고 전국을 다녔다. 어느 달은 집에서 잔 날보다 모텔에서 잔 날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광주광역시의 한 모텔에서는 아예 1달을 선금 하고 지역 조사, 자문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기를 넘기게 된 것은 주말에 낙원으로 컴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토요일까지도 출장지에 있던 적도 수두룩 했지만 그래도 잠시의 귀가가 남은 주중을 버티게 해 줬다.     

그리고 특히 일이 많고 지칠 때 그러니까 여름에 마음과 몸을 치유한 것은 정원놀이였다. 그리고 정원이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것도 여름이다. 물론 잡초와 벌레도 한창이다. 비와 땀 등 습기와 볕으로 몽롱한 여름의 아침은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순간이다. 그리고 원래 내가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 그러기에 타이베이에서 5개월 살 적에도 습하고 더운 날씨가 좋기만 했다. 소낙비에 타이베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열대 나무 사이에서 타이베이 맥주 한잔은 어떤 리조트 못지않은 행복이다. 

     

다시 정원으로 돌아와서. 초여름에 극성이던 해충들은 여름 한창일 때 천적이 나타나면서 오히려 서로 엉켜 살면서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작은 마당의 생태계가 움직이게 된다. 늦봄에 노루오줌에서 시작해 패랭이가 핑키핑키 하다가 흰 독말풀이 벌어지면서 여름이 시작되었다.

그다음 접시꽃, 배롱나무, 참나리 꽃들이 쑥쑥 정원을 밝히면서 제대로 된 '여름의 정원'이 만들어진다. 

담벼락의 접시꽃은 씨를 심어 개꾸었는데 벌레에 뜯기면서도 그보다 더한 생명력으로 정신없이 자라주었다. 


소나기와 쨍한 햇볕.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꽃 들고 거미줄, 잠자리, 풍뎅이, 직박구리, 박새, 등등 등등. 그리고 그 가열차던 여름이 봉숭아꽃으로 저물어 갈 때 가을이 바로 쫓아왔다. 

치자나무는 겨울을 나지 못해 화분에서 키웠는데 현재에도 쑥쑥 자라며 여름에 농밀한 향을 뿜어주고 있다. 

위대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여름은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우아하고 아스라한 가을로 이어졌다. 

가을에 나뭇잎들은 휴식을 취하듯 수그러지고 종이꽃이 빳빳하게 자리 잡더니 가을의 여왕 국화가 감나무 아래 펼쳐지며 감나무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한 해의 결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방지축 메리골드가 정신없이 마당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Herr, es ist ZeitDer Sommer war sehr groß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위에 얹어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주소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모두가 잘 아는 (헤르만 헤세 만큼이나 정원을 좋아했던 그리고 장미에 찔려 사망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의 한 구절이다. 나의 정원에 초가을에 가만히 서있을 때 만큼 이 시 '가을'이 몸 전체에 느끼게 할 때가 없었다. 위대한 여름의 끝에 국화가 남아서 다른 시든 것들을 추억하는 시절이 가을이다. 

그렇게 위대한 여름, 아스라한 가을, 포근한 겨울이 가고 그다음 해 걱정하던 일이 생겼다. 

대한민국 어느 오래된 동네가 겪게 되는 불행한 운명.. 바로 재개발이다. 내가 전세 살던 그 멋진 낙원과 골목길도 여지없이 재개발 대상이 된 것이다. 이미 동네 옆 소박한 5층 단지들은 출입금지 벽이 쳐졌다. 여기저기 레미콘이 흙먼지와 지나가면서 이 동네와의 인연도 멀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으.... 주택과 다시 인연을 끊고 좀 떨어진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다.    

그렇게 일장춘몽 같은 집 마당의 꿈은 접게 되었지만 한번 시작된 정원사랑은 끊을 수 없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새로운 시작을 꾸몄다. 


단지 배롱나무와 동백나무가 함께하지 못하여 사진에서나 남게 되었다. 사랑했다! 너희들을... 그리고 고마웠다.                     

이전 02화 변두리 쪽정원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