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요 계속

걷기. 퇴사생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계속 보여주는 방법

by 김시산

걷기를 매우 좋아한다. 아니 애정한다.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 뒤에 꼭 하는 편이고, 틈 날 때마다 걷는다. 걸음 수가 매일 칠천보 이상인데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다기 보다는 고육지책에 가까웠다. 너무 가고 싶었던 회사의 최종 면접을 망친 날, 난이도 높은 프로젝트가 부담될 때, 괜히 답답할 때. 할 수 있는게 걷는 것 밖에 없어서 일단 나갔다. 효험이 좋았는지 습관이 됐다. 아마도 내 뜻대로 다 할 수 없는 일상에서 두 다리를 컨트롤 해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효능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걸으면서 많은 일을 처리했다. 회사에서는 머리 속이 온통 업무로 가득 차 있다보니 개인 용무 처리는 가장 자리만을 서성이게 된다. 그래서 건성으로 급하게 처리하곤 했는데, 걸을 때는 온전히 그 일에만 집중하게 되더라. 대출 연장 통화, 식당 예약. 엄마와 형에게 이번 퇴사 소식을 전할 때도 어김없이 걷고 있었다.


요즘은 더 많이 걷는다. 퇴사 후에 거리와 시간이 더 늘었다. 정해진 일과가 없으니 스스로 제한만 하지 않는다면 원하는만큼 걸을 수 있다. 나의 시간은 날 위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퇴사를 결심한 주요한 이유였기 때문에 걷기는 장시간 걸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시간을 잘 쓰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는 행위가 됐다.




걷는 시간이 늘고 여유가 생기면 주변을 더 잘 살피게 된다. 더 많이 보고 싶어진다. 새로운 곳을 함유하기 위해 내 안에 넉넉한 공간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하고 가봤던 길은 그간 놓쳤던 게 있나 싶어서 더 유의하게 되니까. 5km 정도는 대중 교통보다 걷기를 선택한다. 약속 장소에 갈 때도 몇 정거장 미리 내려서 나머지 거리를 걷는다. 그러다 보니 편한 신발 위주로 신어야 한다. 풍경을 살뜰히 살피는 일은 의외로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만일 다리가 아팠다면 솥밥을 정성스레 긁어 먹는 외국인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과 선뜻 이해되지 않는 간판 앞에 멈춰 서는 일, 골목 사이에서 은밀히 대화를 나누는 커플을 곁눈질로 보는 장면들은 금방 기억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편한 신발을 선택하는 건 나를 지지하는 일이 된다.


대신 이제까지 구매한 신발들이 갑자기 홀대 받게 돼버렸다. 신발장을 열 때마다 빼곡히 들어찬 신발을 볼 때면 약간 허탈하다. 사무실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그 마저도 회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검은색의 투박한 슬리퍼만 신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많은 신발이 필요했는지. 걸을 시간이 부족할 때는 신발이 많았는데 넉넉해지니 오히려 여러 신발이 필요 없어지게 됐다. 그럼 내게 필요했던 건 신발이 아니라 시간이었던 게 아닐까.




걷는 자세도 신경을 쓰게 된다. 본래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은 잘하고 싶고 잘못된 방법을 고치지 않는 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잘못된 자세나 걸음걸이를 오랜 시간 유지하는 건 몸에 해가 된다. 이왕이면 잘 걸어서 더 건강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다. 팔을 휘젓는 방식, 발을 딛는 순서와 면적 등 신경 써야 할게 많다. 주의할 건, 다 챙기려다가 괜히 몸에 힘이 들어가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가 같이 나가는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 할 수 도 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건 ‘양 발이 11자로 맵시 좋게 딛기’다. 이건 엄마의 영향 때문이다.


아주 어린 형은 걸을 때 안짱다리였다. 엄마, 형, 나 셋이 외출할 때면 엄마는 가장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며 우리의 걸음걸이를 검수 했다. 형이 맵시 좋게 걷지 않으면 엄마는 근엄한 목소리로 “발!!”하고 외쳤다. 그럼 자세를 고쳐잡곤 했는데, 기억에는 계속 혼나던 형이 많이 울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분투의 세월이 있어서인지 이제는 한 아이의 아빠인 형은 잘 걷는다. 엄마가 형제의 걸음을 바로 잡는 장면들이 여럿 떠오르는 걸 보면 아주 많이 반복되었던 것 같다. 부모가 반복한다는 건 무겁고 중한 가르침이라는 건데, 어린 시절에는 이유를 가늠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무게에 눌리지 않았기 때문에 쑥쑥 잘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 때의 가르침은 그 때의 엄마의 나이가 된 나에게 와 닿았다.


걸으면서 엄마에게 이직 없이 퇴사 할 거라는 소식을 전하니 짧게 “집에 내려와서 밥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쉬다가 가~”라고 하셨다. 잘했다, 넌 뭐든 잘할 거니까 걱정 없다는 말을 엄청 긴 메세지로 보낸 형 만큼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뭐할 거니, 하고 싶은게 뭐니와 처럼 당연히 궁금할만한 것들에 대해서도 묻지 않으셨다. 미리 할 말을 준비한 내가 촌스러워졌다. 말을 비운 자리에 들어찬 건 걸음걸이를 가르치던 엄마의 마음이었다. 사람의 삶이라는 건 처음 가보는 길에 적응하고 돌파하는 과정들의 연속이다. 자식이 그 길에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 함께 하는 엄마는, 신을 대리하는 존재라는 특성상 자식보다 자식의 삶에 대해 먼저 보고 더 멀리 본다. 나의 엄마가 끈덕지게 걸음걸이를 가르친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너의 삶에는 골짜기도 있고 비도 많이 올 테지만, 골짜기의 간격을 잘 헤아리고 맞은 비는 햇빛에 말리면 되니, 난해한 지형을 계속 잘 걸어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 또 다른 길을 만날 때까지, 햇빛이 다시 비출 때까지 걷는게 중요하다는 것.




아직 퇴사를 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고, 앞으로 내가 해 나갈 일들이 잘 살펴지지 않아서 안개등을 켠 채 지내고 있다. 피부에 끈끈하게 달라 붙는 구체적인 느낌이 아직 없다. 감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감각되는 상태.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퇴사를 한 사람은 원하는 바를 얻을 때까지 이런 생활을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반복해서 보여줄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진공 상태의 감각에 짓눌려 납작해진 채 제대로 된 의지를 펼쳐 보지 못 할테니까. 내게는 그 방법이 걷기이다. 발바닥 전체를 사용해 땅을 딛는 느낌, 내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과 삶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이 글을 마치면 나가서 걸을 예정이고 그렇게 오늘을 꽉 움켜쥐고 지나갈 것이다.




IMG_0916.HEIC 돌로미티, 오르티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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