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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Aug 03. 2023

제 직업은 환자입니다

CRPS 환자의 투병 에세이 28

2020년. 극심한 통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을 쉬지 못해 기절해서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때 수첩에 적어놓은 문구이다.

"희귀 난치병인 CRPS여서 다행이다.
불치병이 아니니까 난 좋아질 수 있다!!!"

도대체 무슨 패기였을까 싶지만.. 말한 대로 이루어졌다.

2018년 7월부터 통증이 시작되어 만 5년이 넘어가는 현재. CRPS 환자인 나는 믿기 어려울 만큼 좋아졌다.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는데, 신을 수 있는 신발이 3켤레가 되었다.

다리를 움직이고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통증이 솟구쳤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신기해서 창문 밖으로 사람들의 발만 쳐다보았다. 보행 신호등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낄 만큼 제대로 걷지 못했다. 이제는 파란불 신호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뛰어 여유롭게 길을 건널 수 있다.


매일 100알을 넘게 먹던 약*은 줄이고 줄여 하루 평균 6알 정도의 약만 복용 중이다.

이 중 가장 강력한 약제였던 마약성 진통제 패치는 더 이상 붙이지 않고, 지속성 마약성 진통제 또한 복용하지 않는다. 마약성 진통제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올 때만 속효성 약제로 복용 중이다.


더 이상 마약류 주사를 맞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일주일에 3번씩 모르핀과 아티반 주사를 맞았고, 주 1회씩 케타민* 주사를 맞았다. 용량 또한 CRPS 환자 중에서도 심각할 만큼 많았다.

주사실 간호사 선생님들은 나를 볼 때마다 기특하다고 폭풍 칭찬해 주시며 말씀하신다. "마약을 맞다가 끊는 분은 처음 봐요. 소민님은 다른 환우분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계세요." 


마약류의 주사와 약을 끊기까지는 서러움의 연속이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괴로워하며 약을 줄이고 끊으려는 건지.. 때로는 처절하게 투병하는 이 상황에 지치기도 했다.

아프지 않아서 끊은 것이 아니다. 현재도 24시간 통증을 느끼고 있다. 통증이 심한 날 교수님께 상태를 말씀드리면, 마약류 주사를 다시 권하기도 하신다. 나도 사람이기에 아픈 것이 싫어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힘겹게 이루어낸 오늘날의 성과를 지키겠다는 다짐 하나로 마음을 다잡는다. 


담당 교수님은 나에게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말씀하신다. CRPS 증상이 호전되어 마약을 줄이는 상황은 처음이라 교수님에게도 나의 치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시는 담당 의료진분들을 믿고, 주체적으로 계속해서 시도하고 노력했다. 이 모든 과정을 애타게 기도하며 응원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면 멈출 수 없었다. 나 또한 아프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약과 주사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응급실에 갈 만큼 응급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 딸이 언제 응급실에 실려갈지 몰라 24시간 긴장상태로 지내며 방문 앞을 지키던 부모님은 한시름 놓으셨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응급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CRPS 환자로서 비상사태에 대비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미리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걱정 없이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다.

 

팔에 심어놓은 PICC(말초 삽입형 중심 정맥 카테터)*를 제거했다. 이제는 한 달에 1~2번의 주사치료만 받기 때문이다. 

PICC를 제거하자 감염 위험에서 해방되었다. 샤워할 때마다 방수 팔토시를 끼지 않고, 물로 팔을 씻을 수 있다. 관을 삽입한 주위 피부는 두드러기로 엄청난 가려움증이 동반되었지만 더 이상 가려움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척수자극기*가 단 30분이라도 꺼지면 통증이 악화되어, 24시간 내내 척수자극기를 킨 채 생활해야 했다. 자극기의 도움으로 통증이 감소되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평생 자극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통증 상태가 괜찮을 때마다 잠깐씩 꺼놓고 재활을 진행했다. 그 결과, 척수자극기의 전원을 끄고도 통증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점차 기계의 도움 없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최근 몸에 삽입한 모든 기계를 제거하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신과 진료*를 졸업했다. 언제 삶을 포기할지 몰라 위태롭던 시기를 넘기고 정신과 교수님은 "이제 진료 오지 않으면 잘 지낸다고 생각할게"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항상 좋아질 거라고 위로는 했지만, 정말로 이만큼이나 호전되어 약을 줄일 거라고 예상조차 못 했다는 고백과 함께 말이다.


잠을 자기 위해 정신과에서 20알이 넘는 약을 처방받아 매일 밤마다 복용했다. 이제는 단 '반 알'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때때로 통증이 심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에만 추가로 약을 복용한다.

수십 개의 약을 먹고도 통증으로 하루에 채 30분을 자지 못했지만, 성인 평균 수면시간만큼 자는 날들이 많아졌다. 


투병 중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면 항상 당당하게 말했다.

제 직업은 환자입니다.


사람들이 각자의 직업에 열심을 다하듯, 나는 환자답게 생활했다. 통증 호전을 위해서만 집중했고 아프기 이전의 삶을 되찾기 위해 전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지쳐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를 버텨내고 이겨내는 것이 환자의 임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을 보며 상대적인 위로를 얻기도 한다. 누군가는 미안한 마음을 품을 수 있지만, CRPS 환자인 나만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위로라고 생각했다.

통증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는 내가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누구든지 직업 연차가 쌓일수록 실력이 늘고 전문성이 생겨난다. 환자인 나 또한 그랬다. 우스갯소리로 CRPS에 대해 반의사 수준의 의학적인 지식이 생겼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들을 얻게 되었다.

1.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도, 하루를 넘기지 않은 채 털고 일어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2. 예민하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성격에서, 상황에 따라 포기할 줄 알고 무던해지는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3.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까지 못하는 것들도 나에게는 많이 남아있다.

신을 수 있는 신발이 3켤레지만 모두 발에 자극이 가지 않는 편한 신발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이마저도 통증 상태에 따라 신지 못할 때가 있다. 

무더운 여름철 발을 드러내는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지 못한다. 발이 공기에 노출되면 통증이 증가하고, 통증 부위인 오른발의 피부는 붓고 터져있으며 발톱이 깨져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하루종일 침대에서 통증을 참아내야 한다. 여름철과 겨울철에는 통증이 더 악화되어 마음대로 외출하지 못하기도 한다.

악화된 통증이 며칠간 이어지면 다시금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거나 주사를 맞고 싶어진다. 하지만 약을 줄이고 끊는 과정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에 스스로를 달랜다. 감사하게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통증만 몰려온다.


아직까지도 24시간 내내 통증이 나를 괴롭힌다.

통증이 심한 날에는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어 식은땀만 줄줄 흘린다. 통증이 잠을 이겨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도 종종 발생한다. 


신경계가 이미 통증을 각인했기 때문에 언제든 증상이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다시 악화되는 상황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도록 몸을 조심해야 한다.

청년의 때에 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도 많지만 자제하며 살아야 한다. 이럴 때면 CRPS가 장애물처럼 느껴지기도 하나, 금세 떨쳐버릴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키워졌다. 


나는 내가 못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현재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넘치도록 행복하고 감사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전 글 참조)

* 100알을 넘게 먹던 약: 약이 약을 부른다 

* 케타민:  3시간과 맞바꾼 목숨 

* 응급 상황: 휴일이 싫은 이유

* PICC:  사라진 혈관 

* 척수자극기: 30살. 몸속에 기계를 넣다

* 정신과 진료: 몸이 아파서 정신과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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