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국신고서에 직업을 뭐라고 쓰지

직업으로서의 직장인, employee

by 아코더


'직업'을 바라보는 진정성

나는 왜 직업란에 직장인이라고 써야 하는가. 자매품으로 회사원도 있겠다. 애석하게도 그 뒤에는 '부속품'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지 않을까.'로써'가 될 것인가 '로서'가 될 것인가. 수단을 지칭할 때는 '~로써'라 쓰고 사람을 지칭할 때는 '~로서' 라 쓴다. 우리는 부속품이 아닌 존엄한 직장인으로서 살기 위해 '나의 직업'에 대해 시간을 들여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명함에 쓰여 있는 부서 이름을 째려보자. 만약 당신이 구매팀 소속이라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라 구매 전문가다. 이를 더 간지 나게 표현하기 위해 영어로 바꿔보자. 뭐라고 해야 적절할까. purchasing expert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글 번역한 것 같으려나.




What is your usual Occupation?

What is your usual occupation?


마드리드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비행기에서 Departure Card(출입국신고서)의 Occupation(직업) 란을 쓰는데 Engineer라고 쓰기가 다소 민망했다. 그렇다고 Salaryman이라고 쓰기에도 애매하다. 그렇다면 Businessman 비즈니스맨은 어떨까? 왠지 최소 연매출 10억 이상의 사업가 일 것 같은 느낌이다. 결국은 옆사람 것을 베껴 Employee라고 썼다.

대부분의 급여생활자들은 사실 Salaryman이면서 고용당한 피고용자 Employee이다.



무슨 일로 밥 벌어먹고 사는가?

무슨 일을 하며 밥 벌어먹고 사는가? 어떤 일을 하는가? 어떤 활동을 하는가? 직업관을 생각하는 기준으로 위의 물음을 힌트로 드린다. '글로 밥 벌어먹는 여자' 글밥 작가님의 닉네임에서 힌트를 얻었다. 나의 직업을 뭐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O로 밥 벌어먹는 여자라 할 수 있을까. 한 단어로 말할 수 있을까. 엔지니어링으로 밥 벌어먹는 여자라고 하자면 '엔밥(?)'이라고 응용할 수 있으려나.



엔지니어가 바라보는 디자이너

나는 엔지니어링 회사 내 설계부서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엔지니어'라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이때 설계는 Engineering 이라고도 하고 Design 이라고도 한다. 설계쟁이 초반에는 '엔지니어링'이라는 단어가 참 멋있었다. 이제 10년 차를 향하며 Engineering 보다는 Design이라는 말이 더 멋지다.

화학공장을 '디자인'하는 사람. 참 멋진 말이다. 그러나 현실과 많이 동떨어진 표현이다. 더욱이 '디자이너'라 표현하지도 않는다. '창의적인' 디자인을 할 수 없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디자인과 나의 업무를 말하는 디자인(설계)에는 조금 거리가 있다.


공정 엔지니어는 설계 기준을 근거로 그에 맞게 설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관이나 장치에 부식이 일어나거나 폭발하거나 화재가 나거나 심하면 인명피해의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 안전과 직결되는 성격상 창의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디자이너'라고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다.



공과대학을 전공한 내가 생각하는 디자이너란 미술대학을 전공하여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를 쓰거나 실제 그림그리고 칠하는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요즘은 아이패드 미술가들도 많다. 웹툰 작가도 디자이너의 일종이라 해야 할까. 디자이너라고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창조성을 끌어내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과 고충이 있는 블랙스완일 테지만 공순이인 내가 바라보는 디자이너는 '샤랄라'하다.




직장인이 말하는 직장인

6년 전 홍대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 홍대입구 8번 출구 쪽 지하에 있는 서점에 자주 출몰했다. 거기서 나의 시선을 강타한 책들이 있었으니 바로 OOO가 말하는 OOO 시리즈였다. 이를 보며 <엔지니어가 말하는 엔지니어>라는 책도 나오면 재밌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직장인이 말하는 직장인>을 써야 하려나. 나는 자신 있게 <엔지니어가 말하는 엔지니어>라는 책을 쓸 수 있을까. 여전히 주저되는 예술가를 꿈꾸는 직장인이다.



직장인이 바라보는 역무원

4년 전 겨울 어느 월요일, 5호선 출근길에서 평생 잊지 못할 심쿵 멘트를 들었다.


고객님의 예쁜 미소로 시작하는 힘찬 월요일이 되십시오.

'5031'번호의 5호선 지하철을 타고 신길역을 지날 때였다.그 때 이 방송멘트를 들었고 그 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이 분도 지하철 5호선 서울메트로에 근무하는 '직장인' 일 테고 지하철 역무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어두운 뉴스들을 통해 알고 있다. 그 와중에 사려 깊은 방송 멘트를 해주셔서 덕분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


방송 멘트는 정해져 있을 텐데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 준 역무원의 힐링 멘트를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마도 그때 야근을 하며 내 마음이 많이 힘들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자기 직업에 대한 진정성이 있는가.



코로나로 비행길이 막혀버렸지만 언젠가 해외에 나갈 일이 있을 때 출입국신고서를 써야 한다면, 직업란에 Process Engineer 라 적을 수 있을까? 여전히 What is your usual Occupation? 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모르겠고,


그저 오늘 불금(불타는 금요일)인데

빨리 퇴근하고 치킨이나 먹고 싶을 뿐인 직장인이다.



오늘도 직장인은 예술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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