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전에 따른 건축자재와 가상악기의 은유
박판 세라믹 판넬이라는 생소한 외장 자재
건설 프로젝트 중 건축공사는 골조공사, 외장공사, 마감공사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골조는 보통 철근콘크리트구조나 철골 구조를 만드는 공사이고, 외장공사는 건물의 외피를 만드는 공사로 보통 유리, 알루미늄/스틸 커튼월, 알루미늄 판넬이나 석재 등을 사용한다. 마감공사는 각종 방수와 습식을 포함해 건물 내부를 기능적으로 문제없고 아름답고 만드는 공사로 인테리어 공사보다 넓은 의미를 갖는다.
지금 몸담은 프로젝트의 외장에 ‘박판 세라믹 판넬’이라는 자재가 사용된다. 생소한 자재여서 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발주 전에 이런저런 조사를 하며 공부했다. 시방서 상에는 유럽표준규격을 준수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찾아보니 생산지가 주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였다. 타일과 유사하게 판넬을 제작하고 후면에 메쉬망을 접착시켜 강성과 내구성을 확보하는 자재이다.
제조사별, 사용 공간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대리석 무늬부터 메탈릭 느낌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다. 특히 외부에서도 사용하지만 실내에서 인테리어 용도로도 많이 쓰는 것 같다. 대리석 혹은 석재의 이미지를 차용하되 좀 더 강성이 있고 외관에도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자재이다. 석재의 이미지를 현대 기술을 통해 더 좋은 강성으로 확보하는 자재라고나 할까.
인테리어에 사용할 경우 대리석의 이미지를 연출하되 좀 더 간편하게 시공할 수 있다. 대리석은 가공에도 품이 많이 들고, 파손되면 비슷한 색상을 구하기도 어려워서 여러모로 자재 수급과 관리가 쉽지 않다. 반면에 박판 세라믹 판넬은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성품이기 때문에 동일한 패턴, 칼라를 구하기도 쉽다. 시공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벽체에 대리석을 시공하려면 대리석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프레임이 있어야 한다. 보통 석재는 절단면 단부에 구멍을 뚫어 핀으로 꽂아 쌓는 방식으로 시공한다. 석재 단부가 파손되기 쉽고 생산하는 과정 중 생기는 크랙으로 인해 하자도 종종 발생한다. 반면 세라믹 판넬은 그저 길이에 맞게 재단해서 붙이기만 하면 되니, 품도 적게 들고 경량으로 시공할 수 있다.
* 참고로 대리석은 외장에 쓰면 안 된다. 대리석은 내식성, 내산성이 약하기 때문에 인테리어나 장식적 요소가 필요한 공용공간에 사용하는 것이지, 내구성을 요하는 곳에 쓰면 안 된다. 예전 현장에서 스페인산 대리석이 외장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현장에서는 대리석은 내구성이 약해 외장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의견을 냈지만 묵살당했고 도면대로 대리석으로 외부 마감을 시공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후에 결국 군데군데 파손되어서 하자 대응하느라 여러 가지로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오케스트라 가상악기 샘플러를 신청하다.
얼마 전 샘플링 사운드로 유명한 Spitfire의 BBC Symphony Orchestra Discovery라는 가상악기를 받았다. 자주 가는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인데 사운드가 좋다고 추천해서 들어보니 정말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들렸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 보니 구매방식이 특이했다. 49달러를 주고 사던지, 아니면 설문을 하고 2주 후에 받든 지 택할 수 있었다. 바로 쓰고 싶으면 구입하고, 그게 아니면 업체에 정보를 제공하고 기다리라는 의미였다. 급할 게 없으니 찬찬히 많은 설문을 대답하고서 2주를 기다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서 받은 음원의 소리는 기다린 보람이 있는 아름다운 사운드였다. 정말 유럽의 오케스트레이션을 가까이서 듣는 듯한 질감의 소리가 나왔다. 현악기가 활로 현을 마찰하는 듯한 소리의 Texture가 정말 생생하게 들렸다. 소리에 취해 이것저것 또 만들어보게 됐다. 미디 오케스트레이션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게 만드는 멋진 소리였다.
불과 10년 전 만 해도 미디 오케스트레이션의 소리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리 비슷하게 만들어도 전자악기의 딱딱하고 생기 없는 느낌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샘플링이 아닌 전기적인 파형을 변형하여 유사한 소리를 만드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실제 음향을 녹음하고 그것을 샘플링으로 해서 사용한다. 실제의 소리를 녹음하고 기술적인 보완을 거쳐서 미디에서 손쉽게 사용하는 샘플링을 만드는 것이다. 덕분에 내 방에서도 BBC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것 같은 소리를 손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건설 자재와 미디 가상악기의 은유적 연결
외장재이면서 석재의 대체품으로서의 박판세라믹판넬,
실제 오케스트라로 녹음하지 않고도 비슷한 질감의 사운드를 쉽게 만들어내는 가상악기.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주제이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라 성능과 매력을 개선했다는 점에서 내게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이전이라면 많은 가공과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석공사를 간단히 판넬로 붙여서 해결할 수 있다. 오케스트레이션을 녹음하기 위해 대규모 스튜디오에서 많은 사전 준비와 어레인지가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샘플링 사운드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간 디지털을 중심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음악의 영역도 그렇지만, 가장 물리적이고 느리게 발전하는 건설에서도 기술 발전에 따라 새로운 자재가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주제가 이런 공통점을 통해 은유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박판 세라믹 판넬 업체를 선정하는 것은 무사히 끝냈으니 앞으로는 미디 오케스트레이션을 공부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