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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란의 리즈시절

헤어질 결심

by 김글인

바다를 건너는 이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습기를 최대한 포함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해상 경로가 적도에 가까운 무더운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에 상하거나 곰팡이가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2개월 후에 곰팡이 대잔치를 하지 않으려면 뽀송뽀송한 상태로 컨테이너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살아있는 것은 컨테이너에 실을 수 없다. 다행히도 우리 집에는 반려 동물이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었으니, 물고기 구피와 화분들이다. 역시 살아있는 것들은 정을 떼기가 어렵기 마련, 헤어질 결심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나는 결코 식물을 사랑으로 잘 키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다가 예쁜 화분을 보면 집어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엔 내 가드닝 실력에 알맞은, 아니, 내 가드닝 실력에서 살아남은 녀석들만 옹기종기 모여있다. 물 주기에 게으른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선인장이나 다육이 대부분인데, 처분하기 가장 안타까운 신기한 녀석이 있으니, 바로 호접란이다.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이 이름이 맞기를.


한 달 넘게 물을 주지 않는 게으름에도 끈질기게 살아있는 이 녀석도 기특하지만, 물을 줄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으로 한 달이라는 텀을 끌고 가는 나도 참 한심하다. 이래도 안 죽네?를 확인하려는 것은 아닐 텐데, 이런 나를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 매년 한참 추운 무렵에 꽃대가 올라와 한두 달에 걸쳐 꽃망울을 줄줄이 매다는데, 이제 봄볕 같은 날씨가 언뜻 느껴지는 초봄이 되면 드디어 차례차례 꽃이 펼쳐진다. 게으른 가드너임에도 매년 꽃대가 보이는 건 바로 알아챈다. 알아채고 나면 아이 품은 임산부를 보는 것처럼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꽃망울을 품은 기특한 녀석에게 물을 더 잘 주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화분은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올해의 꽃대를 처음 발견했다. 값비싼 꽃다발로 길어야 일주일의 감상을 하는 것보다, 매년 이맘때 꽃대를 올리는 이 녀석의 성실함을 나는 더 사랑했다. 꽃대가 길게 뻗어나가 올망졸망 꽃망울을 매달고, 차례차례 피었다 지는 시간이 두어 달은 지속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화분은 몰라도 이 녀석들은 꽃까지 다 감상하고 처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리즈시절에 사진을 찍어야지



마지막이 될 올해의 꽃대를 다 감상하고 나면, 잘 키워줄 누군가에게 보내야지. 한두 달 후 이 녀석들을 당근 게시물로 올릴 생각을 하니, 내년 봄에는 이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과 함께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넘겨줄 때는 아마도 꽃이 지고 난 후일 테니, 꽃 없이 다소 초라한 모습이 될 녀석들의 리즈시절이 이러함을 증명해줘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주인에게 이왕이면 더 환영받는 귀하신 몸으로, 새 봄에 꽃 틔울 어여쁜 모습을 꿈처럼 품고 있는 존재라고 어필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여권사진, 증명사진을 찍듯이 매무새를 정리해 주고 사진을 찍었다. 찍고 보니 더 애틋한 마음. 식물도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이렇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어느덧 나는 감상적인 생각에 빠져든다. 나의 리즈 시절은 언제였던가? 짐 정리를 하면서 발견한 나의 젊은 사진들이 떠오른다.(물론 사진들은 우리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아직 앳되고 파릇파릇하던 대학 시절, 직장 생활, 연애하던 시절은 물론이고 신기하게도 아이들 어릴 때 육아에 찌들어 있던 때의 내 얼굴도 예뻐 보였다. 그 시절에 분명, 지친 일상에 찌든 내 얼굴이 못나고 안쓰럽게 느껴졌었는데,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 모두 예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사진으로 남아있는 그 모든 순간이 모두 내 리즈시절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 호접란이 매년 꽃대를 올리고 매년 리즈시절을 맞이하는 것처럼, 나도 힘들었다고 느낀 과거의 시간 동안 때때로, 혹은 틈틈이, 혹은 주기적으로 리즈시절이 콕콕 박혀있었던 걸까. 그리고, 호접란의 초라한 시절보다는 화려하고 돋보이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처럼, 나도 힘든 때보다는 즐겁고 행복했던 때만 사진으로 남겼던 모양이다. 결론은, 리즈시절은 한번 가고 다신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거. 지나가도 또다시 찾아온다는 거. 호접란에게도 나에게도.






당근 앱을 열어 호접란을 검색하니, 내가 꽃을 감상하고 있는 계절인만큼 화려한 호접란 거래글이 넘쳐난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박수칠 때 떠나랬는데, 리즈시절인 지금 보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당근장사꾼 3주 차의 여유로움이자 배짱인지도 모르겠다.


<화분 처분. 예약받아요.>

이사를 앞두고 화분 정리 중입니다.
다른 건 다 보냈는데,
요 녀석은 꽃대가 너무 예뻐서
미련이 많이 남네요.

그래서,
꽃이 다 지면 보내려고 합니다.
한창 예쁜 지금 모습이어야
데려가는 분도 좋을 테지만,
저 여리여리한 꽃대는
이동 중에 부러지고 말 거예요.

꽃이 다 질 때까지 더 데리고 있다가,
꽃이 다 떨어지면 꽃대 잘라내고 보내겠습니다.
(꽃대가 없을 땐, 지금보다 민숭민숭해서 미리…)
그래서 예약이에요^^
꽃이 꽤 오래가서 한두 달 후쯤 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그 이상 갈지도요…
내년 2,3월에 이 꽃 보길 기다리면서
여유 있게 입양하실 분 문의주세요.


공동구매나, 사전 예약 판매도 아니고, 화분을 보내기 아쉬워 이렇게 꽃지고 난 후를 예약받겠다는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실험을 해보는 기분으로 글을 쓰고 보니, 사랑과 정성으로 공들여 식물을 키우는 베테랑 가드너로 오해받을까 봐 왠지 뜨끔한 기분이다.

"그 마음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럼 꽃이 지고 화분을 받게 되는 건 언제쯤이 될까요?"


오래지 않아,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며 기다리겠다는 구매자가 나타났다. 한 달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알 수 없는 예약 기간을 이해받은 내 마음은 한없이 따뜻해졌고, 나와 헤어진 후 내년에는 더 귀하게 대접받으며 예쁜 꽃을 보여줄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중고 물건을 사고파는 기능뿐 아니라, 식물을 키우던 감성까지 주고받는 기능을 확인한 것으로 나의 당근 실험은 그렇게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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