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인가, 복수인가
정의인가, 복수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릴 것이다.’
기원전 1792년~1750년경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Hammurabi) 통치 시기에 제정된 함무라비 법전의 일부이다. 위 문구를 보니 어떤가? ‘이게 정의지.’, ‘속이 시원하다.’ 이런 느낌이 드는가?
그 유명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구절 외에도 함무라비 법전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들이 있다.
-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게 되었다면 의사의 손은 잘릴 것이다.
- 건축가가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무너져 주인이 죽임을 당하면 건축가는 사형에 처한다. 만약 집주인의 일가
족이 죽었을 때는 목수의 가족 중 해당하는 이가 죽어야 한다.
- 강도가 어떤 집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면 그 구멍 앞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이 내용을 배울 때 이게 정의인가? 이게 배워야 할 만큼의 위대하고 공정한 법인가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원초적이고 무식한, 그리고 공정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규정들이었다.
하지만 이 법전의 의의는 대단하다. 우선 당시 행해졌던 사적 복수를 제한했다. 당시 행해졌던 사적 복수는 저 법전에 쓰인 것보다도 훨씬 파괴적이었다. 함무라비 이전 시대에는 한 개인의 모욕과 피해는 우리 가족과 가문에 대한 모욕과 피해였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복수는 상대편 가족과 가문의 몰살이었으며 그것이 그 시대의 정의였다.
그런 정의가 함무라비 법전의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의 처벌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전 시대의 무차별·제한 없이 이뤄졌던 복수로부터 피해자가 입은 해(害)와 동일한 정도의 보복만 가능하도록 법으로 제약함으로써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 신분제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하급 신분의 사람에게도 복수가 일정 부분 허용되었다는 점에서 ‘정의로운 처벌’이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이러한 정의가 현대 법정에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의’ 역시 시대에 맞추어 그 모습을 변화해 왔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의의 개념이 변했다. 개인의 복수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처벌만 남았다. 그리고 그 처벌을 위한 과정과 절차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행위의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와 과정을 자세히 살핀다.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처벌을 완료할 때까지 피해자와 가해자를 보호한다. 그리고 처벌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절차를 두고 검증하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를 이루는 과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빠르고, 효과적이지 않다. 느리고 복잡하다.
피해 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피해 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억울하게 어떤 피해를 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내가 당한 만큼 그 상대방도 고통스러운 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수이다. 하지만 복수의 한계도 명확하다. 복수가 이루어져도 내가 당한 피해가 복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나에게 위해를 가한 상대가 나와 같은 피해를 봐야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니다. 상대는 나보다 더 아팠으면 좋겠다. 더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복수는 항상 더 잔혹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학교로 상황을 돌려보자면 학생들끼리의 투닥거림 역시 이런 방식으로 전개된다. 어떤 학생이 장난으로 그 학생의 별명을 부르며 장난을 치면, 상대방은 더 심한 욕을 한다. 그러면 또, 욕을 들은 학생은 손으로 살짝 상대방의 어깨를 친다.
그러면 맞은 학생은 상대방 학생의 머리를 때리고, 머리를 맞은 학생은 또 그 상대를 발로 차고 이런 식으로 처음 시작한 사소한 행위가 점점 강해진다.
그래도 두 학생이 기분이 좋고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서로 ‘장난’이라며 넘어간다. 특히 남자 학생들은 늘 이런 투닥거림을 하며 장난과 힘겨루기 그사이를 즐긴다. 마치 고양이들이 서로 깨물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다가 한 학생이 집이나 수업 상황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나, 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을 때 평소와 다름없이 하던 행동이 문제가 된다.
이런 투닥거림이 몇 번 오가면서 정도가 세지면 둘 사이에서 열세에 놓인 쪽이 결국 교사를 찾게 된다.
"선생님 00이가 저 때려요.” 하고 한 학생이 말해 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근데 △△도 저 때렸어요.” 하고 다른 학생이 말한다. 둘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그 직전에 학생들이 서로 말로 놀린 것부터 시작해서, 어제 이야기, 그제 이야기, 초등학교(중학교의 경우) 때 이야기까지 두서없이 늘어진다. 그리고 결론은 자기는 혼날 것이 없으며 상대방이 먼저 해서 한 거라는 것이다.
이 상황을 학교 폭력으로 신고한다면 어떨까?
이르는 쪽도 그걸 원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선생님 00이가 저 때려요.”와 같은 식으로 이르지 않는다. 그런 신고는 더 정중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이르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나를 놀리고 때린 그 학생이 선생님에게 혼나는 그 상황을 보며 만족하고 싶은 것이다. 그 만족감은 상대방 학생이 선생님에게 심하게 혼날수록 강해진다.
정식으로 ‘학교 폭력’으로 접수가 되면 신고한 학생은 신고를 당한 학생이 혼나는 상황을 볼 수도 없고, 관련 학생들의 조사와 처벌을 완료할 때까지는 모든 조치가 미뤄진다. 그리고 신고한 당사자도 여기저기 조사에 이끌려 다녀야 한다. 전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이후의 처벌 역시 사소한 학교 폭력의 경우 ‘서면사과’가 끝이다. 그 사과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도 않으며, 상대방이 반성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신고를 한 당사자의 마음은 전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럴 때 간절히 원하는 것이 바로 이 ‘참교육’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