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졌던 마음이 다시 사람을 향할 때
서늘해진 기운에 눈을 떴다. 밖은 이미 어둑해졌고, 나는 그 사이 몇 시간을 곤히 잠들어 있었던 참이었다. 뭐가 그리 피곤했던 걸까. 지나가버린 시간에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하루 만보를 채우기로 한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늦은 저녁이라도 러닝머신 위에 오르겠다는 다짐과 함께.
잠들어 차마 빼지 못해 뻑뻑해진 렌즈를 빼려고 욕실로 향하자, 뭉치가 재빨리 내 뒤를 따라왔다. 애교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좀 쓰다듬어달라는 듯. 사랑을 갈구하는 뭉치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그래, 천천히 하자.
주변도 둘러보면서,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자.
책상으로 돌아와, 서늘해진 몸을 데우기 위해 전기 포트에 찻물을 올린다. 따뜻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조용히 앉아 최근의 일들을 찬찬히 반추해 본다. 그러다 불현듯, 최근의 나를 설명할 수 있을 듯한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사람을 떠나려 했지만,
나는 결국 제 발로 사람을 찾아갔구나.
지난 3월 어느 날의 내가 그랬다. 문득, 누군가와 함께 벚꽃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 정착한 지는 고작 2년 남짓. 그것도 최근에 도시를 옮겨, 지금 사는 곳에서는 겨우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가족이라 믿었던 이들과도 거리를 두게 되면서, 이제는 자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가까운 이조차 드물었다.
그래서일까. 내 안에서 다시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는 모험심이 꿈틀댔다. 그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자.
한국의 위대한 중개 매체,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검색했다. 내가 사는 도시에 하이킹 모임이 있을까 싶어서. 이 또한 신의 인도였을까. 마침 내일 아침에 등산 일정이 잡힌 모임이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참석 버튼을 눌렀고, 다음 날 정해진 장소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곳엔 해사한 얼굴의 또래 여성 두 명이 커피를 사들고 나를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3월의 화사한 꽃길 위를 함께 걸었다. 처음 만났지만, 단 세 명이었고 또래였기 때문일까.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생각의 결도 잘 맞았다.
그날 우리는 화제의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 나오는 관식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그런 남자가 실제로 있을 수 있느냐는 화두에서 출발해, 뜨겁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관식이 같은 남자는요,
유니콘처럼 이 세상에는 절대 없는 캐릭터이지 않을까요?”
셋 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미국에서 살아가는각자의 일상, 각자의 커리어에 대한 고민까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이 만남이 참으로 반가웠고, 역시 용기 내서 모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상하다. 혼자 드나들던 우리 동네의 숲길. 혼자서 궁상맞게 고독과 침묵을 음미하던 그 산책로가, 올겨울엔 한국에서 날아온 친구 수인이와 함께 걷는 길이 되더니, 지난 주말엔 하이킹 모임 사람들 여덟 명의 웃음소리로 북적였다.
그토록 내향적인 내가, 그들을 우리 동네로 초대해 이 숲길을 소개했다는 것이 지금도 신기하다. 혼자만의 시간이었던 공간이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걷는 길이 되었다.
지금 이 모임은 신록의 계절을 맞아 매주 등산 모임 일정으로 분주하다. 나 역시 조만간 다시 이들과 조우해 시답잖은 사랑과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시덕 거릴지도 모르겠다. 이 주제 하나로 우리는 또 얼마나 단단한 유대를 만들어 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예부터 입찬소리는 하는 게 아니라 했던가. 사람이 싫다, 사람에게 질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내가 결국은, 다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사람들과 웃고, 걸으며, 공감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렇게 이 시절을 견디고 지나왔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인가 싶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또 사람을 통해 회복되는 존재. 결국 우리는 섬처럼 고립될 수 없는 존재들.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지고 볶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그런 존재들.
사람이 싫다며 등을 돌리던 내가, 다시 사람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조금은 머쓱하게 느껴진다. 혼자이길 원했던 마음은 사실, 함께하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5월의 바람은 여전히 싱그럽고, 사람들의 말소리는 햇살처럼 포근하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사람들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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