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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존엄사 - 의사 딸이 동행한 엄마의 죽음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한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

온 세상이 너무나 깜깜해 매일밤을 울던 날.



볼 빨간 사춘기라는 뮤지션의 나의 사춘기에게 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이다. 나 역시도 제발 세상에서 내가 먼지처럼 사라져 있기를. 그냥 도로에 뛰어들면 차와 부딪히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내가 사라져 있기를. 그리고 나 역시도 아무 흔적도 없이 그냥 내 이름 세 글자가 부디 사라져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라왔던 그때.


늦은 사춘기와 방황을 20대에 실컷 하던 그때 나는 스위스에 조력자살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존엄사에 한참 심취해 이런저런 루트로 나 역시도 스위스로 건너가 저런 조력자살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더 이상 삶에 미련도 없고 더 이상 내가 삶을 이어가 봤자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여권이나 비자조차 만들어본 경험도 없고, 또 덜컥 스위스까지 건너가기엔 그때 당시 내가 너무 심한 무기력증을 앓고 있던 터라 산 건너 바다 건너 움직이기엔 너무 먼 길이었고 조력자살을 알아보는 선에서 끝난 일이었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벼랑 끝까지 내몰려 정말 하루하루가 고문받는 듯한 괴로움에,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존엄하게 죽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이었다.


그때를 무사히 넘기고 바쁜 하루를 보내다 우연히 저 책을 접했다. 나는 알라딘이라는 온라인 서점을 자주 이용하는데 퇴사 사흘 전 지겨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견디던 점심시간 10분 전 뜬 알람에 잠깐 고민 후 책을 구입했다.


사실 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한다면 석 달 열흘 1년 365일을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 같다. 사실 내 20대에서 눈이 뜨여 있는 시간에 절반은 분노에 가득 차 죽고 싶은 마음으로 안 해본 짓이 없고 생각해 보지 않은 죽음의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책은, 죽음의 원론적인 이야기였었다. 그것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그리고 본인 스스로 존엄하고 조용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느지막이 60대 고개를 넘어서는 와중에 소뇌실조증이라는 질환을 확진받은 어머님을 둔 비류잉이라는 대만 의사의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여기서 소뇌실조증이란 운동신경을 담당하는 소뇌가 쪼그라들기 시작하고, 정신은 말짱한데 비해 운동능력마저도 쪼그라들어 결국은 침상에 누워 콧줄에 생명을 의지한 채, 죽는 그 순간까지 가족에게 대소변을 받게 해야 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고 했다.


유전병인 이 병은 부모 중 한 사람이 걸리면 자녀가 50%의 확률로 걸리는데, 이미 비류잉 씨의 삼촌과 사촌이 와상 생활에 대한 비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가족들에겐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저자의 어머님은 60대에 진단을 받으시고선 그때부터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셨다. 사전 연명치료 거부서에 서약을 하고 그 뒤에 죽을 날만 받아 기다리는 사람처럼 빨리 죽자 얼른 죽음아 날 찾아와라가 아니라, 꾸준한 요가와 유쾌한 생활을 지속하시고 중풍에 걸린 부군의 뒷바라지를 다 하셨다.


부군께서도 돌아가시고 점점 몸은 쇠약해지기 시작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서도 83세에 더 이상 거동을 하기가 힘들어지셨고, 그때 어머님은 단식으로 존엄사 하시는 걸 선택하셨다.


이 책에는 어머님께서 단식을 시작하시는 그 순간부터 21일 차 천국으로 이사 가시는 그 시간까지의 기록이 생생히 담겨있다. 가족끼리 생전 장례식을 치르며, 어머님의 천국삶을 응원하고 가족끼리 모여 추억을 회상하고 또 죽음을 목전에 두고 괴로워하는 엄마를 위로하고 가족끼리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며. 그 무수한 고비들과 시행착오.


꼭 찍어 입안으로 넣으면 짠물 가득 터질 거 같은 텍스트들이 때로는 눈물이 났다가 또 때론 불쾌한 골짜기 이론처럼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 부분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차마 죽지 못해 삶을 연명해서 이어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희귀 난치성질환 환자들 뿐 아니라, 불치병 환자, 뒤늦은 사춘기를 맞이해 심한 방황을 하며 20대의 나처럼 삶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느끼는 그런 사람들.


물론 개인이 본인의 온전한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죽음이야 누가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입을 댈 수 있겠냐만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하루를 더 이어나가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존엄사가 도입된다면, 도입되고 나서 돈이 많이 들어가서 가계 재정에 부담이 된다거나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며 삶을 더 이어나가고 싶은 사람에게 가족이나 사회가 죽음을 조용히 그리고 암묵적으로 종용하게 된다면? 생각의 결론이 여기까지 다다르게 되니 속이 깝깝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스크린샷 2024-08-07 021703.png OECD 회원국 자살률 출처: OECD, OECD Health Data(2022. 12. 추출) | 단위: OECD 표준인구 10만 명당 명


OECD 회원국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우리나라.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을 힘조차 다 써버린 사람들이 살아남을 용기보다도 더 커서 선택하는 죽음이라는 선택지. 그 선택을 한 고인들에 우리가 더 뭐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느냐만, 최소한 이 문제는 해결하고 그 뒤에 차차 존엄사에 대한 논의를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당장 아까운 목숨들을 사회와 이웃이 조금만 정말 조금만 팔 뻗어 건지면 얼마든지 건져 올릴 수 있는 사람들을 손도 안 써보고 허무하게 허공으로 날려 버리면서 벌써 존엄사라는 이야기를 하기엔 우리나라 사회의 분위기와 수준이 아직은 덜 익었고 미달인 것 같다.


나는 언제든 누구든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내가 믿는 신께서 그때가 언제 언제든지 올라오라 하시면 육신이라는 짐을 벗고 심판대 위에 올라가 내가 한 행실만큼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언젠간 올 테지만, 그때를 대비하여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치열하게 그리고 건강하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


나는 너 뭐 하다 왔니? 물어보시면 당장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처럼 현재를 충실히 살았고, 나누고 베풀며 살다 왔습니다! 하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삶을 살아내는 것.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선택지는 각자의 온전한 선택에 맡길수 있어야 한다는것.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 논의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것!


오늘의 독후감 끝!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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