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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핀 개나리

어쩌나

by 원성진 화가

토요일 오전 대충 주워 입고, 눈이 내린 서대문구 안산을 올랐다.

홍제천을 따라 걷다가, 홍제폭포 앞 징검다리를 건너 산자락을 밟는 순간, 도시의 소란이 뒤로 밀려났다.

흰 숨결을 머금은 흙길이 앞을 열어줄 때, 마음도 낮은 언덕처럼 천천히 고요에 기울었다.

도심 속 자연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느렸고 묵직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잠시 멈춰 서도록 부드럽게 팔을 잡아주는 존재였다.


산을 오르다 무심코 발걸음을 멈춘 건, 눈밭 속 한 송이 개나리 때문이었다.

아직 겨울의 문턱, 계절의 순서를 잊은 듯 노란 꽃 하나가 따스하게 피어나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설산에서, 그 꽃은 혼자 봄을 되살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조금의 어긋남과 작은 비극이 있었다.

꽃이 제때 오지 않은 계절을 꿈꾸고 있었다면, 그것은 희망일까 아니면 어리석은 기다림일까.

그러나 한 송이의 꽃을 보며 마음을 아프게 만든 건,

그 꽃이 계절보다 먼저 앞질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시간의 경계를 모르고, 자기 안의 적정한 때를 놓친 것처럼.

눈밭 위 개나리는 너무도 밝았다.

그래서 더 외로웠다.

피어난 이유를 묻지 못한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꽃잎은 바람에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촛불 같았고, 그 모습은 인간의 삶과 닮아 있었다.

때로는 누구보다 빠르게 피어나길 꿈꾸고, 또 때로는 남들보다 느리게 물들어 버리는 인생.

우리는 저마다의 시계 속에서 움직인다.

봄이 와야 피는 꽃도 있지만, 기다릴 수 없어 미리 터져버리는 생명도 있다.

다만 그 모든 순간은 자기 나름의 빛을 품는다.


어디로 걸을지 계획도 없었지만, 이미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상의 봉수대가 보이자 계단은 미끄럽고, 흰 눈빛은 더 깊어졌다.

아래로 펼쳐진 서울은 숨결처럼 흔들렸다.

수많은 삶이 켜켜이 쌓여 있는 도시. 건물들은 서로를 베고 기대며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나는 거대한 생명체의 심장을 보는 듯했다.

도시 전체가 들숨날숨을 다해 살아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기계 같으면서도, 신경과 감정이 흐르는 하나의 생명체 같았다.

그 장대한 숨결 속에서, 나는 그저 작은 점 하나로 존재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작은 점이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만큼은 경이와 위안이 동시에 찾아왔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가만히 마음속에 개나리 한 송이의 노란 온도를 가져왔다.

서울의 거대한 숨결과 겨울 산의 낮은 호흡, 그 사이에서 어긋난 계절은 작지만 단단한 질문을 남겼다.

살아있다는 건 무엇일까.

제철을 지키는 삶이 더 옳은가, 아니면 제때를 건너뛰어도 좋을 만큼 자신에게 충실한 순간이 존재하는가.


눈 내린 산을 내려오며, 나는 확신보다는 여운을 품었다.

때늦은 봄과 너무 이른 봄 사이에 놓인 한 송이 꽃처럼,

우리 삶 역시 어느 계절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 채 피고 진다.

계절에서 비껴 난 것이 슬픔이라면, 그 슬픔 속엔 반드시 작은 아름다움이 깃든다.


오늘의 안산은 도시보다 더 깊이 나를 이해했다.

말없이 품어준 산길, 눈 속에 고개 든 개나리, 봉수대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호흡.

그것들이 내 안의 시간과 조용히 섞여 새로운 온도를 만들었다.

겨울의 시작을 앞두고도 봄처럼 피어오르는 마음 하나.

그 미세한 떨림이 삶을 다시 걷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이어지는 날들은 또 다른 계절의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때쯤 다시 산을 오를 나를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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