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루의 시간 -13
조금 뒤에 그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 내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까 봐 더 열심히 일에 집중했지만 내가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보다 내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긴장을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제멋대로 심장이 쿵쾅거리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 진우 씨랑 먼저 가 있는다."
수찬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리고 이내 손을 흔들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갑작스러운 약속에 아무런 준비도 못한 나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가기 전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옷도, 피부도, 헤어 스타일도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장실 어두운 조명 탓인지 평소보다 더 칙칙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까지 구겨져 버렸다.
밝은 색 재킷을 입고 올걸.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가방 속을 뒤져 붉은색 립스틱을 꺼냈다. 그리고 과하지 않게 조금씩 바르며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조금 얼굴이 밝아지는 듯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그 사람에게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 역시 선뜻 연락해 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을 나와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메고, 천천히 회사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갑자기 기온이 조금 떨어진 듯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내 마음속에서도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더 춥게만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회사 정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이었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그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내 마음으로 온기가 들어오는 것 같이 따뜻해졌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연락을 주셨으면 미리 나왔을 텐데요."
"금방 왔어요. 일하는 데 방해될 거 같아서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어요. 제가 센스가 없었나요?"
"아니에요."
그 사람을 마주 보며 내 얼굴은 어느새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는 나란히 걸어서 회사 앞 호프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 들어서자 이미 수찬은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진우와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처럼 꽁냥 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오창윤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수찬에게 먼저 인사를 했고 진우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저는 서은이와 제일 절친 지수찬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을 향해 수줍어하는 수찬의 모습을 보자 진짜 내 남편 될 사람을 소개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조금은 수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며 가슴 한 구석이 쓰라렸다.
우리는 맥주와 과일, 간단한 스낵 안주를 시켰다. 그 사람에게 질문할 게 많아 보이는 수찬을 보며 나는 맥주 한잔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어머, 술도 잘 못 마시는 애가.. 천천히 마셔. 뭘 그렇게 긴장을 하는 거야?"
나는 손사래를 치며 복숭아를 입에 넣었다. 그 사람은 수찬의 말에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우리 서은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서둘러 결혼을 하는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 우리 어릴 때 알던 사이야. 같이 놀이 꽤나 했다고."
수찬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줄 곧 그 사람에게만 눈길을 고정한 채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하도 결혼하라고 닦달을 하길래 그냥 내가 결혼해 버리자고 했다니까."
급기야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버린 수찬은 더욱 간절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그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사람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이 되어 복숭아 한 조각을 통째로 입 안에 넣고 와그작와그작 볼이 터져라 씹었다.
"제가 어릴 때 서은 씨를 많이 좋아했어요."
그 사람의 대답이 나오자 순식간에 시간이 멈춘 듯 내 마음속에는 정적이 흘렀고 입 안에 가득 채운 복숭아가 목구멍까지 가득 차올랐다.
"어머나, 그럼 말로만 듣던 첫, 사, 랑?"
"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사람은 그렇게 대답했다. 네,라고.
보이지 않아도 내 얼굴은 붉게 타올랐을 것이다.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는 이미 내 얼굴의 감정변화를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맥주 한잔을 또 단숨에 들이켰다.
"그럼 이제껏 첫사랑을 기다린 거고 결국 첫사랑이 이루어진 거네요."
로맨스 소설을 읽는 어린 소녀마냥 수찬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했다.
마치 '공주님은 이웃나라 왕자님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본 것만 같았다.
"또, 또 오버한다. 죄송합니다."
진우가 수찬을 면박 주듯 말했지만 수찬에게 과일을 입에 넣어주며 토닥거렸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통의 연인이라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저런 사소한 티격태격마저도 어쩐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에게는 영영 닿지 않을 그런 장면이 가슴 어딘가를 서글프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와 그 사람. 우리 둘은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