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익어가는 시간 -14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갔다. 마치 가을날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풍경 속에 있는 듯한 우리의 젊음은 아름다웠다. 그 사람의 표정도 밝고 화사했다. 우리는 함께 대화하며 웃었고 서로에게 공감했으며 아주 오래 알고 지내온 사람들처럼 서로를 대했다. 까탈스럽고 깍쟁이 같던 수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그녀 역시 그 사람에게 푹 빠져드는 듯했다.
한껏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진 수찬은 줄곧 2차를 가자고 졸랐다.
"미안해. 나중에 엄마집에 들러야 할 것 같아."
갑작스럽게 잡힌 약속 때문에 엄마집에 들르기로 한 것을 깜빡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수찬에게 다음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좋았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사실 그 사람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만남을 마무리할 때쯤 그 사람이 먼저 나가 계산을 했다. 당연히 결혼할 우리가 계산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 사람이 나가자 수찬은 내 허리를 슬쩍 꼬집으며 말했다.
"써언, 기똥차게 잘 골랐네. 이제 마음 놓고 널 맡길 수 있겠다."
우리는 호프집 문 밖으로 나와 부쩍 차가워진 바람의 공기를 맡으며 어둑해진 저녁을 함께 맞이했다.
수찬은 진우의 팔짱을 끼고 몸을 바짝 밀착하며 말했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나요."
수찬과 진우가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은 괜스레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함께 가면서도 티격태격 사랑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서은 씨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네요."
그 사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찬은 아닌 듯 투닥거려도 나를 유난히 챙기는, 유일한 나의 친구였다.
"어머님댁까지 제가 함께 갈게요."
그 사람은 나에게 데려다준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함께 가겠다는 말이 왠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니에요. 오늘 고마웠어요. 저는 바로 택시 타고 가면 돼요."
더는 나에게 말을 덧붙이지 않고 휴대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택시를 타고 멀어져 가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에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괜히 더 미안해지게.."
"네?"
"아, 아니에요."
"연지동 그린빌로 가면 되죠?"
"네."
어두운 택시 안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큰 건물들, 나무, 아름답게 반짝대는 수많은 조명들, 그리고 그 사람. 흐려진 창밖의 풍경 안으로 그 사람의 얼굴이 슬며시 스며드는 듯했다.
내 마음이 무언가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걸까. 그 사람과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일 뿐인데..
택시를 타고 이십 오분쯤 걸려 엄마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인기척도 없는 그곳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5층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이 내 발걸음 따라 켜지는 불빛이 외로운 듯 휘청거렸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부엌에서 반찬을 챙기고 있었다.
"왜 꼭 오늘 오래? 반찬은 나중에 가져가도 되는데."
"오늘 반찬을 했는데 며칠 지나서 맛 떨어진 거 가져갈 게 뭐 있니? 그리고 너에게 할 이야기도 있고. 전화로 이야기하면 너와 대화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아서 오늘 부른 거야."
엄마는 진미채와 장조림, 볶음 멸치등을 내가 가져갈 반찬통에 담으며 이야기했다.
"결혼식을 왜 안 하겠다는 거야?"
"그냥 그러기로 결정했어요. 아빠도 돌아가시고 올 친척들도 없는데 굳이 결혼식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진짜 올 사람도 없고."
"무슨 도둑 결혼하니? 무조건 안돼. 그런 건 없어. 가족끼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식장부터 알아봐라."
"..."
"왜 말이 없어?"
"그냥 우리가 결정한 데로 따라주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창윤이 엄마도 원하지 않을 거다. 아들 장가보내는데 왜 몰래 결혼을 시키냐고?"
"창윤 씨 어머니하고 통화했어요?"
"그래. 애들이 원하면 그렇게 해야죠. 하는데 목소리가 썩 달가워하지는 않는 눈치더라. 네가 그랬지? 창윤이한테 네가 그렇게 하자고 그랬지?"
엄마의 말이 맞았다. 오로지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이야기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내 결혼식에는 올만한 친척도, 친구도 마땅치 않았다. 그 사람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떠들썩하게 우리의 결혼을 공표하기에는 아직 내 마음의 힘이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