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의 <시녀들>
키가 작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지하철에서 남자친구와 싸웠습니다.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남자를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했더니 합격하자마자 헤어지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너보다 조건 좋은 여자를 만나겠다고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네가 키가 작아서 남보기에 부끄러웠다'라며 팩트 폭격을 날렸습니다. 방금 전까지 화려한 언변을 자랑했던 남자친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인류가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에는 키가 큰 사람이 보폭이 넓어 효율적으로 이동할 있었고, 맹수로부터 도망갈 때도 유리했을 것입니다. 큰 키는 영양 상태가 양호하고 질병이 없는 건강한 체질로 인식되었지요. 20세기 6.25 전쟁을 겪고 배가 고팠던 한국인들에게도 큰 키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생존에 유리한 체격을 가졌기에 집단 내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고, 이성에게도 매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큰 키에 대한 진화적, 사회 문화적 의미가 축적되어 키 우월주의가 탄생한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사울 펠드먼이 처음 제안한 키 우월주의라는 용어는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의 키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대우를 뜻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순한 차별을 넘어 괴롭힘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남성집단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나고, 키가 큰 사람은 연봉이 높으며 직장 내에서 높은 지위를 점유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인간이 신체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는 현대에도 사회적 대우가 '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키가 작은 남성이 개를 데리고 있습니다. 체격은 작지만 표정은 근엄합니다. 그가 두른 망토는 키에 비해 너무 길어 보입니다. 시종과 눈높이가 비슷한 개는 체격이 크고 가슴이 넓어 위풍당당해 보입니다.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긴 다리에는 날카로운 발톱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추기경의 문양을 목에 두른 녀석은 대형견으로 유명한 스패니시 마스티프 종으로 추정됩니다. 마스티프 종은 체격이 크고 주인에게는 순종적이나 낯선 사람에게는 경계심이 많고 사나워 가축을 지키거나 군견, 투견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수컷은 키가 70-85cm, 몸무게는 50-70kg 정도 되는 대형견입니다. 이 작품은 안토니스 모르(Anthonis Mor,1517-1577)의 <그랑벨 추기경의 난쟁이>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키가 작은 사람들은 오랜 기간 차별을 받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사람을 결정하던 시절, 유럽 왕실과 귀족들은 이들을 동물보다 하나 위의 계급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이들은 대개 궁정이나 귀족에게 속하여 동물을 사육하거나 집안일을 하는 시종으로 살았습니다.
안토니스 모르(Anthonis Mor,1517-1577)는 네덜란드 출신의 초상화가로, 벨기에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 영국, 포르투갈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모르는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할 때, 미술 애호가였던 그랑벨 추기경(Antoine Perrenot de Granvelle,1517-1586)의 눈에 띄어 오랜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랑벨 추기경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총리였고, 그랑벨 역시 20대 초반에 추기경이 되어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의 재상을 지냈습니다. 그랑벨은 미술 애호가이자 컬렉터였던 모양입니다. 선대부터 수집한 미술품을 많이 물려받았고, 당대에는 티치아노, 브뤼헐 등 여러 화가를 후원하며 자신의 초상화도 남겼습니다. 그랑벨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 2세가 그랑벨의 수집품을 대거 사들였기에, 이 작품들은 빈이나 마드리드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컬렉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의 초상화가 아니라, 개와 함께 있는 왜소증 시종의 초상화였습니다. 체격이 크고 용맹스럽게 보이는 개와 나란히 서 있는 이름 없는 시종의 초상화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요. 역사는 부유하고 유명했던 사람보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약자에게 주목하게 되나 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종의 경직된 표정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집니다. 초상화를 주로 그렸던 모르는 키 작은 시종이나 튜더 왕조의 메리 1세 모두 근엄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그렸습니다. 키 작은 사람에 대한 그의 존중의 시선은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로 이어졌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시선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azquez, 1599-1660)의 가장 유명한 작품 <시녀들>을 한 번 볼까요?
금발의 마르가리타 공주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새침한 표정으로 중앙에 있습니다. 양쪽의 시녀들이 공주를 달래고 있네요. 오른쪽에는 왜소증 시종 마리아 바르볼라(Maria Barbola)가 있습니다. 연골무형성증의 특징적 외모를 지닌 마리아는 비록 키는 작지만 당당한 시선과 표정으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옆에는 왜소증 시종 니콜라스가 발로 개를 깨우고 있네요.
왼쪽에는 붓을 든 벨라스케스 본인이 서 있습니다. 자화상도 아닌데 화가가 그림에 등장하다니, 그는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는 걸까요?
뒤에 걸려있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면 벨라스케스는 사실 국왕 부부를 그리고 있었는데 마르가리타 공주가 작업실에 방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모님과 놀고 싶어서 떼를 쓰는 것을 시녀들이 달래는 장면일 수도 있겠네요. 이 장면이 TV 프로그램이었다면 촬영 스탭 쪽을 담은 깜짝 영상일 것입니다. 거울 옆에는 밖으로 나가는 문까지 있어 무대의 뒷면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그림의 높이는 3m에 이르지만 인물을 아래 반에만 배치한 점이 독특합니다. 윗부분은 벽면과 천장에 할애했는데, 어둡지만 자세히 보면 높은 곳에 그림 두 점이 걸려 있습니다. 둘 다 루벤스의 작품으로 왼쪽은 <아테나와 아라크네>, 오른쪽은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입니다. 아라크네는 옷 짜는 솜씨를 놓고 신과 대결을 벌여 승리한 당돌한 존재였고, 마르시아스는 피리 연주로 음악의 신 아폴론과 겨루었지만 패배해 죽은 인물입니다. 한쪽은 승리했고 한쪽은 패배했지만 둘 다 신의 권위에 도전한 예술가였지요. 벨라스케스는 뛰어난 실력, 인품, 사업수완, 외국어 실력으로 외교관 역할까지, 화가로서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던 루벤스를 동경했습니다. 어쩌면 그가 루벤스의 그림에 적지 않은 지분을 할애한 이유는 '화가란 기술자가 아니라 신과 겨룰 수 있는 뛰어난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벨라스케스는 왕족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초상화에 왜소증 시종, 흑인 노예 등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신분으로 삶이 결정되던 시기, 벨라스케스는 그들을 희화화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며 그렸습니다. 왜소증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구경거리로 보았던 왕실의 시선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다른 왜소증 시종의 초상화를 봅니다. <세바스찬 데 모라의 초상>에서는 모델을 앉히고 주먹을 쥐게 하여 신체 특징이 최대한 덜 드러나게 하고 시선을 얼굴에 집중시켰습니다. 세바스찬은 정면을 당당하게 응시하고 있네요. 비록 왜소증 시종이지만 귀족 못지않게 당당하고 존엄한 느낌입니다. 평상시 세바스찬의 삶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키와 신분에 상관없이 주인공으로 느껴집니다.
심리학에는 표상(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는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특정 이미지로 머릿속에 각인되는데,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자기 표상, 타인의 이미지를 대상 표상이라고 합니다. 세바스찬을 인식하는 벨라스케스의 대상 표상은 작은 키의 시종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엄한 인간이었을 것입니다.
귀족과 성직자만이 높은 신분이었던 벨라스케스의 시대, 화가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예술가보다는 기술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라는 타이틀을 넘어 귀족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평생을 노력한 결과, 마침내 벨라스케스는 순수혈통의 귀족만 들어갈 수 있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가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낮추어 그린 적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가 귀족이 되고 싶어 했던 이유는 화가로서 예술세계를 당당히 인정받으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릅니다. 추측컨대 벨라스케스의 자기 표상은 건강했을 것입니다. <시녀들>의 왼쪽에 서 있는 그의 표정과 몸짓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위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게 보이니까요.
저신장의 의학적 의미와 키우월주의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성장판 검사를 위해 진료실을 방문했습니다. 아이의 키는 161cm로 또래 남아와 비교할 때 3 백분위수에 가까운 키였습니다. 아이도 어머니도 성장판이 닫혔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남아의 성장판은 개인차이가 있지만 대개 16-17세에는 닫히게 됩니다. 혹시 늦게라도 키기 더 클지 궁금했던 아이와 어머니는 검사를 강력하게 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성장판이 닫혀있는 보통 17세 남아의 소견이었습니다.
아이는 분노하며 왜 진작에 성장호르몬 주사를 놓아주지 않았냐고 어머니를 원망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들의 말에 흥분하셨지요. 저는 남학생의 눈을 보며 말했습니다.
"그때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았어도 사실 얼마나 컸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개인차가 있거든요. 그리고 키는 작아서 불편한 점이 있을 수는 있지만, 건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학생은 지금 건강하게 잘 성장한 편입니다."
그러자 아이는 분노를 거두고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렇게 생각은 못 해 봤는데, 그럴 수도 있을까?'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모자는 그럭저럭 만족하고 진료실을 나갔습니다.
출생 시 신생아의 키는 50cm 정도로 생후 2년 동안, 그리고 사춘기 시작부터 15~16세 시기에 급속 성장을 합니다. 두 시기를 제외하면 1년에 5~6cm 정도 성장하는데, 1년에 4cm도 자라지 않는다면 병적인 성장 부진을 의심합니다.
병적으로 작은 키를 성장호르몬 주사로 치료하는 경우는 크게 2가지입니다. 첫째는 뇌종양이나 뇌손상등으로 생긴 성장호르몬 결핍이고, 두 번째는 성장호르몬 결핍은 없으나 병적인 원인으로 키가 작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건강에 문제가 없는 특발성 저신장 때문에, 혹은 저신장에 해당하지 않지만 부모의 기대치보다 예상키가 작아 성장호르몬을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발성 저신장 아동에게 2-3년간 성장호르몬을 투여했을 때 최종키는 예측키에 비해 5-6 cm 정도 더 큰다고도 하지만 개인차가 많아 논란이 있지요.
모든 약이 그렇듯 성장호르몬에도 부작용이 있습니다. 흔하게는 몸이 붓거나 갑상샘 기능이 저하될 수 있고, 혈압과 혈당 증가, 수면 무호흡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드물지만 머리 내 압력이 증가하면 응급이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호르몬은 꼭 필요한 환자군이 있고, 부작용을 모니터링하며 맞을 수 있는 안전한 약물입니다. 그러나 이 약물의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난다면 그만큼 부작용도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에서 성장호르몬 처방이 불필요하며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뉴스를 보게 되는데요. 약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처방 건수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성장호르몬의 처방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키 우월주의가 널리 퍼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어머니와 함께 진료실을 방문했던 고등학생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의 얼굴에는 분노와 좌절감이 담겨 있었지요. 그러나 '키는 건강과 직접 상관이 없다'는 말에 아이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분노를 거두었습니다. 아이를 괴롭혔던 건 작은 키가 아니라 작은 키에 사회가 부여한 의미였던 것입니다.
벨라스케스는 키 작은 시종들을 그렸지만 결코 그들을 작은 존재로만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키와 상관없이 다양한 매력과 개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벨라스케스의 신분에 상관없이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요. 키와 신분을 초월해 다양한 시각에서 대상의 매력을 표현한 벨라스케스만의 화풍은 <시녀들>이라는 걸작을 낳았습니다.
돌아가신 제 어머니는 키가 150cm 전후로 작은 편이셨습니다. 저는 요즘으로 따지면 그리 큰 키도 아니지만 어머니를 훌쩍 넘어섰지요. 어머니의 친구분들은 '네 키를 보니 엄마가 소원성취했구나'라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금 큰 키 덕분에 제 인생에서 해결된 문제는 별로 없었습니다. 키가 작았다면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지만, 진료실에 왔던 고등학생처럼 작은 키 자체가 아니라 작은 키에 부여한 의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벨라스케스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수 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작은 키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습니다. 어쩌면 키는 현대사회의 암묵적 신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키 작은 사람과 키 큰 사람, 신분이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이 한데 섞여있는 <시녀들>을 보면서, 키 우월주의(heightism)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