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향여행자 Oct 06. 2023

소(所)는 누가 키우나6 : 용기를 낸 첫 전시 덕분에

품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들, 풀어낸 이야기를 다시 품는 사람들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안양과 서울에서 출장 일정이 있었어요. 일을 마치고 바로 강릉으로 돌아가기 아쉬워서 둘째 동생네 집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어요. 사랑스러운 조카를 보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했어요. 추석 연휴에 봤으면서도 또 눈에 아른아른거리는 거죠. 첫 조카라서 그런가 봐요. 조카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해요. 볼 때마다 쑥쑥 크는 것도 신기하고요. 언제 '이모'라고 불러줄까 오매불망 기다리기도 했죠. 아라를 보러 간 날, 잠들기 직전에 불쑥 '이모'라고 해주던 밤을 잊을 수 없어요. 그렇게 '처음'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을 선물해 주는 조카여서 더없이 소중하기만 해요. 부모님께도 동생들에게도 가장 큰 보물이 되었죠.


저에게 소집의 전시들이 보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작가님들의 첫 전시가 그렇습니다. 소집에서는 50번의 전시 중에서 22번의 전시가 작가님들이 처음 용기를 낸 전시였어요. 작가님들이 어렵게 용기 내 준 것도 감사하고, 많은 공간 중에서 소집을 택해 준 것도 정말 감사해요. 저도 처음 하는 공간이고, 더군다나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작한 갤러리라서 더더욱 '처음'을 함께하는 게 각별하더라고요.


'첫 단추를 잘 꿰야 한다'고 해서 첫 전시는 가장 긴장이 되지만, 그만큼 보람도 가장 커요. 전시 첫날은 작가님도 저도 긴장감이 가득하지만,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들의 다정한 말들에 얼었던 마음이 서서히 녹곤 합니다. 소집을 함께 지키는 날. 소집으로 오는 골목길도 애정해 주는 작가님들이 있는데요. 소집에서 첫 전시를 열고, 지난해 연말연시 초대전으로 소집에서 두 번의 전시를 연 백지현 작가님은 늘 소집을 찾을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해요.

저는 여기 오면 약간 지브리.. 지브리 만화 공간에 오는 느낌이 항상 들어요.


백지현 작가님은 소집 초창기 때부터 전시가 바뀔 때마다 꾸준히 소집을 찾아주는 분이기도 해요. 그래서 소집의 사계절을 함께 느껴주고 좋아해 주는 작가님이기도 해요. 작가님에게 소집은 어떤 공간인지 물어보니 '정신적인 환기를 시키러 오는 휴식 공간'이라고 하더라고요. 집에서 작업하면서 스트레스받고 답답할 때마다 생각나는 곳이고, 자주 찾는 장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첫 전시를 소집에서 열어야겠다는 결심에까지 이르게 된 거죠.


제가 이제 요정들을 막 이렇게 찾는 작업들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라면 이 공간을 찾는 느낌과 들어와서 제 그림들을 보는 느낌이 잘 맞을 것 같아서 결정한 것도 있고요. 그리고 첫 전시였는데 너무 넓거나 이러면 부담이 돼서  공간 사이즈도 저는 되게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딱 마음에 드는 위치였고요. 딱 이렇게 걸 수 있는 것들을 제가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자꾸.

첫 전시를 열기까지 주변 동료 작가님들의 열렬한 응원도 컸고, 자신의 작품과 공간의 어울림을 깊이 고민하며 어렵게 용기를 낸 백지현 작가님. 그 용기 덕분에 2020년 봄과 여름 사이에서 <풀잎을 들어보면> 전시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한창 코로나19로 세상은 시끄럽고 마음 어지러운 시기였는데, 그림 속 요정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순간만큼은 잠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곤 했었어요.    

 

첫 전시를 하기 전까지 ‘내가 전시를 해도 되나’ 뭔가 왠지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면 작품이 막 엄청 팔려야 할 것 같고 이런 부담이 되게 있었어요. 뭔가 그런 부담에서 살짝은 벗어나서 되게 편하게 준비를 많이 도와주시고. ‘그래 할 수 있어.
나도 한번 해보자!’ 정말 용기 내서 하게 된 것도 있어요.  


소집은 전시가 열리는 동안 작가님이 매일 상주하지 않아도 되지만, 백지현 작가님은 최대한 자주 소집에 머물며 전시를 보러 온 분들과 만나는 시간을 갖곤 했었어요. 깜짝 선물을 나눠주는 세심한 마음까지 더해져서인지 백지현 작가님의 전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기도 해요. 작품이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한 걱정도 컸는데 기우였어요. 우연히 강릉 여행을 왔다 작품에 반해서 컬렉터가  분도 만나고, 작가님의 작품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으로 컬렉터가  지역주민도 만났죠. 그러한 처음의 순간들을 곁에서 함께 경험하는 저 역시도 덩달아 기쁘고 행복하더라고요. 그러다 2년이 흐른 후, 지난겨울에 연말을 함께 보내고 새해를 함께 맞이하는 초대전으로 백지현 작가님과 또 한 번 전시를 열게 되었죠. 전시를 하기 1년 전부터 일찌감치 함께 전시를 열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냈었답니다. 백지현 작가님의 그림들은 포근한 이불처럼 마음을 안아주곤 해서 겨울과 참 잘 어울릴 거 같았거든요. 그래서 연말연시에 함께 전시를 열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드렸는데 작가님이 흔쾌히 응해준 덕분에  <Maybe we're, 어쩌면 우린> 전시회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집은 전시회 예고 영상으로 새 전시 홍보를 시작하는데요. 전시가 열리기 2주일 전쯤, 작가님에게 전시 소개글을 받아서 그 이야기를 토대로 예고 영상을 제작합니다. 매 전시 때마다 작가님들이 쓴 전시 소개글을 보면서 전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기도 하고,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기도 하고, 마음이 쿵-할 때도 있어요. 가끔 보고 또 보게 되는 글이 있는데 백지현 작가님의 전시 소개글이 그래요.  <Maybe we're, 어쩌면 우린> 전시 예고 소개글을 살포시 전해봅니다.


노인이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이 아닌, '삶을 지켜낸 사람들'로 인식된 건 최근 사이의 일이다. 큰일은 아니었지만 자꾸만 병원에 갈 일이 생겼고, 그곳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분들을 보며 어떤 불안이 가슴속에 씨앗처럼 박혔다. 그리고 삶을 지켜낸 노인들이 경이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노인이 될 수 있을까. 그 대단한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소망하는 삶을 그린다. 내가 갖지 못할까 봐 두려운 불안을 그린다. 지켜내지 못할까 봐 슬펐던 미래를 그린다. 상실의 감정이 없는 세계를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 동안 나의 불안감은 서서히 희석되기 시작했다. 나에게 그림은 치유다. 붓을 잡는 시간은 평안이고 행복이다. 나는 오늘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이부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외출하는 사람이지만, 더 이상 불안에 잠식된 삶을 살지 않는다. 적어도 화폭에 내가 동경하는 삶이 담겨 있으니 괜찮다. - <Maybe we're, 어쩌면 우린>, 백지현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


백지현 작가님의 초대전은 아버지 소집지기가 각별하게 생각하는 전시이기도 해요. 공감이 많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매 전시 때마다 친구분들에게 홍보를 많이 하지만, 특히 백지현 작가님의  <Maybe we're, 어쩌면 우린> 전시는 꼭 봤으면 하는 전시라서 술자리에서도 열렬히 홍보를 하시더라고요. 좀 놀라기도 했습니다. 전시를 보러 온 아버지 친구분들도 많이 좋아해 주셨어요. 그래서 더 잊지 못하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아버님이 맨 처음 전시할 때는 ‘어려운 분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살짝 있었어요. 어른이시고 근데 제 그림을 열심히 걸어주시고, 제 작품들을 되게 열심히 설명해 주고 하시더라고요. 나이가 있으신 어른분들 오시면 오히려 아버님이 계셔서 되게 편하게 얘기하고. 반가워요, 요즘은.


백지현 작가님은 아버지 소집지기가 지키는 날에 더 자주 오셔서 전시를 보곤 해요. 아버지 소집지기도 많이 반가워하는 작가님이기도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님들이 처음에 아버지 소집지기를 어려워하세요. 그러다 전시를 하면서 서서히 거리감을 좁히며 전시가 마무리될 쯤엔 한결 편안한 사이가 되곤 합니다. 마냥 불편해하는 작가님들도 있어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처가 되었던 건 '사람들이 공간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왔는데 웬 중년 남성이 있으면 관람객들이 당황하거나 실망할 수 있다며, 가급적 딸 소집지기가 소집에 으면 좋겠다'고 한 어느 작가님의 말이었어요. 사실 소집 후기의 90%는 아버지가 지키는 날에 온 관람객들이 쓴 후기거든요. 아버지가 지키는 날, 얼마나 애를 쓰는 지를 잘 아는 저로서는 솔직히 그 말을 들었던 순간에 화가 났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하고 싶었죠.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난 후, 아버지도 그 작가님과 함께 있는 날에 꽤나 불편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드니 더더욱 마음이 울컥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아버지 소집지기가 계셔서 더 편안하고 좋다고 이야기해 준 백지현 작가님에게 고마움이 더욱 커요. 부디 아버지의 투박한 말투 속에 정을 읽어봐 주는 작가님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동안 첫 전시의 용기를 내 준 작가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글로 한 편 한 편 다 풀어내지 못한 점 부디 서운해 마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소집에서의 유한한 시간 속에 첫 전시의 용기를 내어 만나게 될 작가님들께도 미리 감사드립니다.

이전 05화 소(所)는 누가 키우나5 : 전시를 떠나보내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