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린이 다이어리 77
* 이 글은 8월 말에 썼습니다.
달리기를 쉰 지 어언 6개월. 비록 운동을 쉬고 있었지만 종종 나를 조금이라도 뛰게 만드는 순간들을 마주친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괜히 마음이 급해져서 결국 뛰고 만다. 그것도 한창 더운 여름날, 잠시라도 달리고 나면 온몸에 열이 후끈 오르며 후회가 밀려온다. '그냥 걸을걸.' 그럼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당연하게 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우선 횡단보도 신호등이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다. 지하철역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지나게 된다. 집이 마두역과 정발산역 중간에 있어 한 정거장이라도 가까운 마두역으로 다녔다. 문제는 횡단보도가 한 10미터 정도 남았는데 파란불이 들어왔을 때다. 장항로가 왕복 8차선이어서 파란불 신호가 긴 편이다. 그럼에도 괜히 놓칠까 봐 마음이 급해진다. 결국 달린다. 전력질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빨리 걷는 것보다 달리면 안심이 된다. 항상 신호등 파란불은 횡단보도까지 거리가 10미터 이상 남았을 때 들어온다. 10미터, 뛰기는 귀찮은데 안 뛰자니 마음이 불편한 애매한 거리다. 뛸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뛴다.
늦여름철 아침 날씨도 제법 후덥지근하다. 횡단보도를 건넌 후 다소 거칠어진 호흡과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히면 '왜 뛰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다음은 지하철. 횡단보도를 앞두고 급하게 뛰는 것이 싫어서 출근길 경로를 정발산역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바꿨다. 정발산역 가는 길에 신호등이 있는 긴 횡단보도가 없어 마음 급하게 달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이건 웬걸. 여전히 유혹은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퇴근이 익숙하지 않아 출근할 때 굳이 네이버 지도로 열차 도착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다. 다만 경험적으로 이쯤 나가면 여유 있게 도착하겠지라는 느낌으로 집을 나선다. 조금 걸으면 정발산역 1번 출구가 저 앞에 보인다. 갑자기 뒤에서 한 여성이 나를 지나쳐 역을 향해 뛰어 나갔다. '어? 뭐지? 열차가 오나?'
괜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또 달린다. 따라 달리면서 '저 여성이 나랑 반대 방향인 대화행 열차를 타는 분은 아닐까?' 하며 의구심이 떠오른다. 부랴 부랴 에스칼레이터를 내려오니 아직 열차가 도착하진 않았다. 역시 반대편 열차 승객이었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나는 대체 왜 따라 달렸던가?'
'옆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따라 뛰는 것을 보면 나는 파블로프의 개인가?'
괜한 자괴감이 밀려온다.
또 다른 유혹은 지하철을 갈아탈 때다. 3호선을 타고 하염없이 가다가 신사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탄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열차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신사역에 도착해 문이 열리면 일부 환승 승객들이 우르르 달려 나간다. 나도 뛰어야 하나 싶다. 다행히 평소 일찍 출근하는 성격이라 신사역에서는 그렇게까지 맘 졸이진 않는다. 그래도 우르르 달려 나가는 승객들을 보면 다리가 움찔거린다.
사실 굳이 달릴 필요는 없다. 횡단보도나 지하철을 놓치면 기다렸다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면 된다. 그래봐야 고작 5분 남짓일 거다. 그런데 항상 마음이 급하다. 미리 가서 기다리는 시간은 아깝지 않지만, 놓치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괜히 아깝고 낭비 같다. 그리고 그 기다리는 시간이 느낌상 참 길고 지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기다리기 싫어서 아등바등 달리게 된다.
또한 한 차례 기다린다고 해서 출근 시간이 크게 늦는 것도 아니다. 워낙 출근 시간 30분 전에 도착하게끔 움직이니깐. 그런데도 옆에서 누군가가 뛰면 나도 덩달아 달리게 된다.
참 신기한 것은 출근길에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남녀를 막론하고 참 잘 뛴다. 특히 어딘가를 향해 전력질주를 하는 여성을 본 적이 있다. 전문 달리기 선수인 줄 알았다. 마치 미션임파서블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달리 듯 맹렬하게 뛰었다. 게다가 자세가 엄청 격동적이었다. '저분은 평소에도 달리는 사람일까? 단거리 육상 선수일까?'는 생각일 들 정도다.
마지막 유혹은 회사에 도착해서다. 사무실이 9층에 있다. 건물에 들어서는데 저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는 불이 깜빡인다. 다시 또 달린다. 이 건물은 엘리베이터 4대를 가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는 깜빡이는 사인을 보면 나는 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뛴다.
그런 것을 보면 나 만큼 남들도 기다리는 것이 싫은가 보다.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다.
순간순간 10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를 달리면서 발 상태를 가늠해 본다. 왠지 달릴만할 것 같았다. 다시 달려볼까 하는 마음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족저근막염으로 한동안 달리지 못했더니 강제로 달리는 순간순간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그만큼 달리기에 고팠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평소 내가 또 언제 뛰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런데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뛸 일이 없었다는 소리다. 평소에 얼마나 몸을 쓸 기회가 없는지 여실히 깨닫게 됐다. 그나마 최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뛸 상황이 생긴 것이지, 그전에 자차로 출퇴근할 때는 일부러 달리지 않으면 뛸 일이 없었다. 새삼 다시 한번 달리기가 나에게 왜 필요한지 깨달았다.
그리고 9월 초 나는 다시 달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