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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노란 벽돌 길을 달린다.

런린이 다이어리 81

by 견뚜기

어느새 가을이 왔다.


일산호수공원을 가득 매운 파란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바래더니, 11월 중순 만개한 은행잎에 호수공원을 노랗게 물들었다. 그리고 떨어진 낙엽에 온통 길이 울긋불긋한 낙엽길이 되었다.


삭, 삭, 삭, 삭'

두 발이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가르는 소리가 왠지 개운하기만 하다. 노란 은행잎 가늑한 길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 길(Yellow Brick Road)' 같았다.

길에 수북히 쌓인 은행잎이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노란벽돌길을 연상시킨다.

이 풍경, 이 느낌이 괜스레 그리웠다. 그동안 낙엽 가득한 길을 다시 달리고 싶었다.


달리기에 한창 빠져있던 작년, 문뜩 호수공원의 사계절을 사진을 찍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계기는 벚꽃이었다. 벚꽃 잎 흩날리는 호수공원을 달리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다 보니 호수공원의 다른 모습을 담고 싶어졌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으로 이미 호수공원의 사계절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달리기 바빠서 사진으로 담진 않았었다. 사실 달리기 힘들어 죽겠는데 경치를 볼 여유까진 없었다. 지나고 나니 그 변화의 모습을 담아 슬라이드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이름하여 '모네 프로젝트.'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빛의 변화를 연작으로 그린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어차피 매 주말 새벽 호수공원을 달리니 1년 동안 꾸준히 달리면 가능할 것 같았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지점 4군데를 정했다.


우선 호수공원을 시계 방향으로 달릴 때 1.9km 표지판을 지나 500m 정도 더 달리면, 내가 달리는 자전거 도로 양 옆으로 가로수 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길이 나온다. 마치 숲으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여름에는 만개한 푸른 나뭇잎이 천정을 만들어 동굴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묘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첫 번째 스폿, 항상 자전거 도로 위에 있는 화살표를 기준으로 사진을 찍었다.


좀 더 달려 2.9km 표지판을 지나면 호수교가 나온다. 그 애수교를 지나면 얕은 언덕길이 나오는데, 벚꽃 시즌에 벚꽃이 만발한 그 길이 그렇게 이쁘다. 일명 벚꽃 맛집. 여기가 두 번째 스폿이다.

두 번째 스폿. 벚꽃이 흩날리면 환상적이다. 다만 언덕길이라는 것이 흠이다.


호수공원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도 두 군데 스폿을 정했다. 0.9km 표지판을 지나 호수교 언덕에 못 미치는 지점이다. 날이 어두울 때 가로수 나무들 밑에 설치된 조명이 파란색, 보라색, 붉은색, 초록색으로 빛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으시시하면서도 이색적인 길이다.


세 번째 스폿. 어두운 밤 가로수 나무 밑 조명 색깔이 계속 바뀌어 다른 세계로 가는 것 같다.

그리고 호수교를 지나 자전거 도로 왼쪽에 난 길을 따라가면 메타세쿼이아길이 나온다. 같은 호수공원 내 있는 길인데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흙길 양 옆으로 높은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완벽한 숲길이다. 밤이 되면 이용객들을 위해 길 따라 조명등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한 여름 파란 나뭇잎이 숲길을 가득 메우는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다. 메타세쿼이아길 중간 조명등을 스폿으로 정했다.

네 번째 스폿인 메타세쿼이아길.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의 청량함에 취한다.


2024년 2월부터 모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다행히 2023년 겨울에 눈 내린 길 사진을 찍었었다.) 나뭇가지 앙상한 호수공원, 눈이 수북하게 쌓인 길, 벚꽃 잎 흩날리는 길, 초록이 만개한 시원한 숲길 등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1년을 채워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만들어 브런치에 꼭 올리리라 굳게 다짐했다.


겨울철 두 번째 스폿. 눈 쌓인 길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지나, 무더운 여름을 버텼다. 매주 주말 오전 6시~7시에 호수공원을 달렸다. 토요일은 시계 방향으로, 일요일은 반시계 방향으로 달렸다. 가을 풍경만 찍으면 1년 프로젝트가 완성된다.


거의 다 왔다. 그랬는데!

10월 중순 마라톤 대회에서 무리하고 나서 족저근막염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의 달리기는 멈췄다. '알록달록한 가을의 풍경만 담으면 됐는데.'


발의 통증이 사라지고 새벽에 걸어서라도 가볼까 했다.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하고 미완성 '아쉽다! 미완의 모네프로젝트'와 '일삼호수공원의 3 계절' 글을 올렸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진한 미련이 남았다.


지난 10월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가을이 찾아왔다. 드디어 호수공원의 가을 길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사실 달리기 첫해에는 달리는데 정신 팔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발에 걸리는 낙엽들이 불편하기 걸리적거리기만 했다.


자연을 즐기게 된 것은 그다음 해, 모네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다. 그래서 이번 가을 러닝이 더욱 기대됐다. 가을 러닝길은 알록달록 색의 향연이었다. 겨울을 앞두고 생명력을 끝까지 불태우는 것 같았다.

일산을 떠나기 전에 일산의 사계절을 기억에 새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내 러닝의 고향, 일산호수공원이 항상 그리울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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