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이미지다 3편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사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야 한다. 현상학은 에드문드 후설의 철학 중 하나이지만, 우리가 접하는 모든 철학은 테제와 안티테제를 통해 발생하고 다듬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물이다. 단순히 하이데거만을 보려 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철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이를 단순한 '좋은 생각'을 모아둔 잡지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철학은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의 도구를 필요로 한다. 고대 철학자들이 수학자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그의 기하학적 논증 방식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을 이해하려면 순서를 따라 배우고, 익혀야 할 개념과 도구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이데거가 사용한 '실존'이라는 용어는 단순하지 않다. 이는 주체이면서 객체이고,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복합적 개념이다. 그가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데카르트의 선언은 중세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중심에 두려는 시도였다. 이는 인간이 신의 섭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할 수 있다는 용기의 표현이었다.
칸트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이성 중심의 인식론이 본격적으로 비판되기 시작한다. 칸트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이성이 곧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라는 전제 자체를 의심한다. 우리의 이성이 정말로 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 순수한 이성이란 존재하는가?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이 칸트의 철학을 형성했다. 결국 그는 우리가 '인식 주체'가 아니라 '현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불교의 '일체유심조'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가 인식을 통해 규정하는 모든 본질은 실체가 아니라 인식의 결과일 뿐이며, 따라서 본질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판단력비판'을 통해 우리가 부여한 모든 본질적 개념에 대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묵언 수행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언어라는 기호와 기의가 과거의 집착을 불러오므로, 이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의 해체 과정이 후설에게 계승되었고, 후설은 이를 현상학적 방법론으로 정리한다. 후설의 현상학이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론적으로 발전시켜 "존재 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즉, 단순한 대상의 현상이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름 없는 있음'을 사유하며, 인간이란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채 기획적으로 스스로를 투사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사고는 이후 사르트르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는 기반이 되었다. 사르트르는 인간만이 본질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고 보았고, 이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실천적 개입(앙가주망)으로 이어진다. 그가 까뮈와 결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르트르는 유물론적 실존주의를 추구했지만, 까뮈는 '있음'이 만들어내는 감정적 상태에 주목했다.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와 달리 더욱 근본적으로 '있음 자체'에 집중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그는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을 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사회적 기호와 기의 속에 묶여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름을 갖고, 사회적으로 해석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순수한 '존재'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속세를 떠나 수행하는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있음에서 발생하는 현상, 아니 있음 그 자체가 현상이기에 우리는 기호를 통해 기의를 형성한다. 기호와 기의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관계 안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상학적 사유란 곧 "내가 어떤 맥락에서 해석되는가"를 성찰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기호를 통해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러한 사건이 곧 현상이다. 그러므로 관계 속에서 우리는 특정한 맥락을 가지며, 그 자체로 현상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그것이 곧 현상학적 사유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