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루야마 겐지, 《납장미》
B29. 최고의 머리말, 소설 다카쿠라 켄 / 《납장미》 - 마루야마 겐지 지음, 양윤옥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시작하는 소설
이것은 물론 소설입니다. 하지만 그냥 소설이라고 해놓고 나면 대번에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이 느낌이 미묘합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혹스럽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숱한 소설들을 읽어오면서 단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책을 펼쳐 들었을 때 맨 처음 독자를 맞이하는 것은 제목 다음으로 한 장의 사진입니다. 바로 일본의 ‘국민’ 영화배우 다카쿠라 켄의 사진입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소설책을 대한다면, 이 소설이 《물의 가족》을 쓴 마루야마 겐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빼놓고, 독자는 가장 먼저 이 한 장의 흑백사진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분명히 소설인 줄 알고 책을 펼쳐 들었는데, 느닷없이 실존하는 영화배우의 사진이 우리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두 가지 반응
여기서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카쿠라 켄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반응이요, 또 하나는 다카쿠라 켄이 누구인지 잘 아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여기서 작가가 후자 쪽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사진과 바로 맞닿아 있는 작가 자신의 머리말(‘작가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요.
모르는 사람 가운데서는 이 사진 속 인물을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실제로 두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드는 인물 형이기는 하니까요.
또, 아는 경우라도 도대체 작가가 이 사진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얼른 감을 잡기가 힘들 것입니다. 기껏해야 ‘실명소설(實名小說)’ 정도 아닐까요. 하긴, 이는 드물기는 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소설 장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소설은 다카쿠라 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종의 ‘실화소설(實話小說)’일 것입니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보기를 들자면, 이순신 장군이 주인공인 《칼의 노래》(김훈)나 《불멸의 이순신》(김탁환) 같은 ‘역사소설(歷史小說)’, 또는 협객 김두한이 주인공인 《장군의 아들》(홍성유) 같은 ‘시대소설(時代小說)’을 얼른 꼽을 수 있겠고, 나아가 예전에 ‘실전소절(實傳小說)’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이문구 선생의 《유자소전(兪子小傳)》도 떠오릅니다.
한데, 이 소설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머리말이 열쇠입니다.
마지막 진정한 영화배우
마루야마 겐지는 이 머리말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하긴, 마루야마 겐지와 ‘망설임’이라니요? 있을 수 없는 조합이지요―다카쿠라 켄을 가리켜 ‘마지막 진정한 영화배우’라고 규정하고 시작합니다.
나태하고 나이브한 창작 정신에 보기 좋게 철퇴를 먹이는 《소설가의 각오》(김난주 옮김, 문학동네)라는 책을 쓴 마루야마 겐지의 규정이기에, 설사 그것이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배우에 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소곳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 규정에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다카쿠라 켄을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올 정도의 괴물’이라고까지 일컫습니다. 마루야마 겐지 자신이 영화배우 다카쿠라 켄을 그런 ‘괴물’로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스스로 압도당했다는 고백이지요.
작가의 말은 더 이어집니다.
이제 마루야마 겐지한테 다카쿠라 켄은 ‘카메라로 포착하려면 반드시 한계가 발생하고 마는, 배우의 범주를 아득하게 초월한 육체적이며 또한 무섭도록 정신적인 희귀한 존재’입니다.
이쯤 되면 이것은 이미 하나의 ‘배우론’입니다. 이만큼 도저하고 당당한 배우론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소설로 쓰는 배우론일 것입니다.
뒤를 잇는 작가의 말은 이 생각을 넉넉히 받쳐줍니다.
‘다카쿠라 켄의 내면에 숨겨진 미지의 광맥을 고스란히 캐낼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는 어느 누구도 핵심을 잡아내지 못한 감춰진 매력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작가가 이 소설을 쓴 까닭이요 목적입니다.
마침내 작가는 다카쿠라 켄을 ‘다카쿠라 켄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연기할 수 없는, 영화나 연극처럼 절대적인 주인공’이라고 규정하고야 맙니다. 다카쿠라 켄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도저한 선언입니다.
실명소설이든 그 비슷한 무엇이든, 아니면, 그와는 전혀 다른 무엇이든, 여기서 독자는(혹은 저는) 벌써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작가는 마지막 일격을 가합니다.
‘가볍고 얄팍하고 저급하며, 유약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문학계는 물론이고, 역시 똑같은 이유에서 쇠퇴의 비탈길을 내닫는 영화계를 향한 경종과 자극의 의미도 담아서…….’
‘고고(孤高)의 작가’답게 기개 있는 발언입니다.
여기서 저는 서둘러 책장을 넘겨 본문을 읽기 시작하는 자기 손끝의 떨림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머리말입니다.
다시 사진으로
이쯤 되니, 책 첫머리의 사진 한 장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 속에 있는 것은 왼쪽 무릎을 세운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다카쿠라 켄의 상반신이자 옆모습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얼굴은 오른쪽 반면입니다.
흑백사진인 탓에 정확한 색상은 알 수 없지만, 그는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목 폴라 차림입니다.
조명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전방 조금 위쪽에서 쏟아지는 조명에 이마에서 콧날을 거쳐 인중과 입술과 턱에 이르는 부분이 은은히 빛납니다.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조금 더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눈길은 수평에서 조금 아래쪽을 지그시 바라봅니다.
오른쪽 가르마를 탄 짧은 머리는 뒷부분보다 앞과 옆이 보기 좋게 희끗희끗합니다.
누가 봐도 다카쿠라 켄,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배우입니다. 멋집니다. 《납장미》는 그가 주인공인 소설입니다.
독법의 문제
이제 문제는 독법입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읽을 것인가.
역시 실명소설인가 보다, 하고 바야흐로 소설의 첫 부분을 읽어나가다 보면, 금세 독자는 주인공의 이름이 ‘겐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실명소설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카쿠라 켄이 주인공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명소설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요? 이미 작가 스스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실존 배우 다카쿠라 켄이라고 밝혔는데도 그 주인공의 이름은 다카쿠라 켄이 아니라니요?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예의상 다카쿠라 켄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이유가 아니라면, 답은 하나뿐입니다. 곧, 이 소설의 내용은 다카쿠라 켄의 실제 삶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소설에서는 처음 보는 사례입니다. 적어도 저는요.
영화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그러니까 특정 배우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해당 배우의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혹은 그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와 장면들로 시나리오를 채우는 식의 작법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마루야마 겐지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쓰듯이 이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이 소설을 읽는 독법이 결정됩니다.
다카쿠라 켄의 이미지, 또는 그 어떤 본질을 끊임없이 떠올리며(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미지를 즐기는 식의 독법입니다.
이것만은 다카쿠라 켄을 잘 알고, 또 좋아하는 사람만의 특권입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특권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거나 문체를 음미하는 식의 일반적인 독법이 아닙니다.
이 독법을 위해서 작가는 스스로 ‘영화보다 더 영상적인 문장’을 구사했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 개개인의 몫이겠지요.
다카쿠라 켄이라는 주인공
이런 소설을 두고 줄거리를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한 문장 한 문장, 한 장면 한 장면, 한 대목 한 대목이 모두 다름 아닌 다카쿠라 켄이라는 한 압도적인 배우의 이미지, 또는 그 고유의 성격에 고스란히 빚을 지고 있으니까요.
제목인 ‘납장미’의 정체나 의미도 이 책을 읽는 사람의 은밀한 기쁨을 위해서 고이 덮어두고 싶습니다.
그래도 다카쿠라 켄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맡았던 캐릭터가 협객(俠客)이었던 것을 십분 감안하여 작가가 이 소설의 주인공 ‘겐조’를 칠십 줄에 접어드는 나이의 퇴역 야쿠자 두목으로 설정했다는 점은 밝혀두어야겠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런 인물이 오랜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여 고향 땅에 돌아와 겪는 이야기입니다.
두 거인의 만남
이 정도만으로도 벌써 다카쿠라 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용솟음치기 시작합니다.
물론 영화 〈철도원〉(1999, 후루하타 야스오)의 주인공 정도로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한테는 다소 무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자후기’를 참조하면, 책 첫머리의 사진은 작가 자신이 손수 찍은 것으로, ‘악의 극한까지 치달았던 이 소설의 주인공 겐조가 형무소 독방에 멍하니 앉은 모습’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럴듯하지요?
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이 소설을 쓰기 전에 먼저 다카쿠라 켄한테 전화를 걸어 집필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다카쿠라 켄은 손수 자동차를 운전하여 작가의 집을 방문했고, 거기에서 이 사진의 촬영이 이루어졌다는군요.
서로 다른 분야의 거인과 거인의 만남, 온 마음으로 기리고 싶은, 참으로 흔치 않은 만남입니다. *